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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Dec 16. 2021

닭치고 닭먹어

미역국을 먹고 싶다고 했더니 아내가 한 솥 가득히 끓여줬다. 그릇에 몇 국자 덜어내면서 내가 그랬다.
“소고기네. 미역국은 역시 백합조갠데….”
“그러게. 할 수 없지 뭐….”
대학시절 서울에서 나고 자란 친구와의 대화에서 그 친구가 한 말이 떠올랐다.
“뭐? 미역국에 조개를 넣어먹는다구? 소고기가 아니고?”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을텐데 나는 그 반응에 의아해했었다.

나는 분명 미식가는 아니다. 좋아하는 음식과 그다지 내켜하지 않는 음식이 있을 뿐이다. 싫어하는 음식이라고는 말하지는 못하겠다. 여지껏 반찬투정을 해 본 적도, 가리지도 않으니까.
대체적으로 고기류보다는 생선이나 나물, 양식보다는 한식을 좋아한다. 어릴 적 식습관으로 돌리기에는 내 친동생이 햄과 소시지 그리고 라면에 환장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어류와 해산물이 풍부한 지방에서 나고 자란 환경적인 영향은 있는 것 같다.

다행히 누구나 맛을 보면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어머니의 요리 솜씨 덕에 전통음식에 관해서는 나름대로 미각이 예민한 편이다. 역시 그렇다고 미식가을 자처할 수준은 못된다.
언젠가 아주 비싼 소고기를 대접받은 적이 있다. 좌중에 한 명이 그랬다.
“캬~ 고기 좋네. 이 마블링 봐라. 맛있겠는걸…”
다른 이가 그 말을 받았다.
“근데 마블링이 이렇게 끼려면 소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알아? 그건 말야….”
그의 말을 빌면 송아지때부터 옴싹달싹 못하도록 가둬서 키워야한다고 했다. 운동량이 부족해야 근육 사이에 지방이 낀다는 것이었다. 이후 지금까지도 드물게 찾는 고기집에서 눈꽃이나 대리석으로 표현되는 마블링이 좋은 A++등급을 찾지 않는다.

내게도 연중 멀쩡한 날보다 만취한 날이 많던 시기가 있었다.
주종과 무관하게 한 선배와의 술자리에서 쌓이는 술병이 유독 많았다. 아직까지 그처럼 달고 맛있게 술을 들이키는 분을 만나지 못했다. 이끌리듯 그 날은 주량이 늘 수 밖에 없었다.

한국은 삼겹살로 대표되는 돼지고기의 소비량이 단연 1위다. 그렇지만 점포 수나 소비량 증가폭으로는 닭고기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군대에서는 닭고기가 많이 나온다. 운이 따라줘서 보급이 잘되는 부대에서 복무했다. 대한통운 트럭 몇 대에 실려 온 냉동 닭고기를 나르는 사역을 한 날 저녁에는 허리께까지 오는 알루미늄 배식통 절반 정도를 채운 튀긴 닭을 먹었다. 많이 먹다 보면 닭똥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그때 영향인지 아니면 튀긴 음식이 별로인 식성 탓인지 튀김닭을 좋아하지 않는다. 설사 먹을 기회가 있어도 양념치킨은 시키지 않는다.

치킨집을 운영하던 지인의 언질 때문이기도 하다.
“묵은 기름으로 튀기면 튀김옷 색깔이 진해지지. 그래도 양념을 바르면 모르니까 업소에서는 프라이드는 되도록 새기름에, 양념용은 아무래도 묵은 기름에 튀겨. 그리고 그 봉 있잖아. 닭다리만 있는 거. 부위별로 나온 것들…. 그건 국내산 닭이 아니야. 다 수입한 냉동이지”
어찌됐건 나로서는 자주 찾지도 않는 닭고기인데 우리집 냉장고에 닭고기가 비는 날은 없다. 파우치에 든 닭가슴살이다. 아내와 딸이 채워 놓는다. 가족끼리도 선호가 갈린다. 좀더 신선한 기름에 튀긴 국내산이냐 아니면 건강과 다이어트를 위한 특정부위의 수입산이냐로….
그런데 퇴근해서 식탁에 놓인 치킨 포장박스를 열어보면 늘 양념치킨이다. 튀긴데다 칼로리와 당이 높은 양념을 둘러 씌운 것이다.
나로서는 아이러니한데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미역국에는 소고기가 당연했던 친구나 주변 사람의 말에 눈꽃 소고기가 별로였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미각은 혀나 입 안에만 있는 것도 아닐 뿐더러 계량하거나 표준을 삼을 수 없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하물며 같은 술이라도 함께 하는 사람한테 먼저 취하면 더 과음하게 되지 않는가.
누구와 함께 하는 자리인가 혹은 무슨 생각으로 먹느냐에 따라서도 음식의 맛은 달라진다. 그런데 언행이 불쾌한데다 도저히 신뢰가 가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먹는 음식 맛이 좋을 리 없다. 나는 음식의 맛도 사람과 상관관계가 있다고 믿는다.

느닷없이 닭의 크기를 두고 논쟁이 벌어진다. 정확하게는 맛으로 귀착되는 것 같다.
또다시 아이러니를 느낀다. 닭의 크기나 맛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부자는 치킨을 먹지 않는다” “서민에게 값싸고 맛있는 큰 닭을 먹을 수 있기를 바란다”라는 주장과 이 논쟁을 일으킨 사람 때문이다.
나 역시 드물긴 하지만 부자가 먹는다는 고가의 요리를 먹을 기회가 있다. 맛있었던 기억은 없다. 마찬가지로 부자는 내가 찾아간 시골 장터의 음식을 먹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부른 배를 두드리며 뒤뚱뒤뚱 식당을 나선 경험도 없을 것이다. 그가 맛있게 먹었을 확률? 글쎄다.
최소한 나는 빈부로 음식은 선호를 논하는 데는 동의하기 어렵다. 부자의 식단을 부러워하거나 자격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치킨이 서민 음식이고 그래서 싸고 맛있는 치킨을 먹게 해주고 싶다는 주장을 정당화하려는 전제다. 사람의 감정부터 자극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풍긴다. 저질언론의 기사 타이틀이 대개 그렇다. 그 냄새는 며칠째 갈지않은 기름에 튀긴 치킨만큼 역하다.

그는 늘 왜 이런 방식일까? “떡볶이는 세뇌화된 음식이다” “DNA도 단백질이다” “음식에 설탕을 넣는 건 사기다” “한식과 소불고기는 일본에서 유래됐다”
폭탄 먼저 투척 해놓고 진격하려는데 대부분 그 진지는 비어 있거나 폭탄에 다치는 쪽은 자신이다. 그래도 끊임없이 구시렁대며 또다른 허술한 사제폭탄을 제조하는 테러범같다.
나는 그가 왜 스스로 미식가가 아니라면서 맛은 따지는지 모르겠다. 그럴 수는 있다. 자칭 음식 전문가고 주관적인 영역이니까. 그렇다면 왜 그의 입맛이 기준이 되어야 하는지, 왜 다른 나라의 자료와 통계, 국내기관의 보고서 내용으로 입증하려는지 궁금해진다. 다분히 미식가의 영역이고 객관적 지표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모순적인 행태는 일관성을 띄기까지 한다.
글쟁이임를 강조하는데 그의 글은 SNS에 올라오는 일반인 수준에도 못미칠 때가 허다하다. 사업가가 아니라면서 광고와 판매등 그의 활동은 영리를 추구한다. 컬럼니스트라면서 과거에 주장한 자신의 글로 반박 가능한 글을 재생산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이를 미뤄 짐작하건대 그의 말과 글에는 진정성이 한 톨도 들어있지 않다. 그가 꺼려하는 MSG로 맛을 낸 음식 같고 양념으로 닭 맛을 숨기는 치킨은 바로 그가 아닌가 싶다. 그가 진정으로 걱정하는 건 서민의 입맛이 아니라 자신의 입맛대로 되지않는 세상인 것 같다.

“내 말에 반박하려면 그만큼의 글을 읽거나 혹은 지식을 충분히 갖추길 바란다"고 한 그의 말을 되돌려주고 싶다.
이제껏 충분히 드러난 전문성도, 최소한의 검증도 하지않는 자신의 부박하고 게으른 습성부터 고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그의 ‘아무말 대잔치’에 초대받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제대로인 잔칫상을 차려놓더라도 하더라도 말이다.
아울러 그토록 육계와 치킨 산업을 논하고 싶다면 다만 일주일간만이라도 육계장 근무나 치킨집 알바를 자처하길 권한다.

“나는 이해하는 것보다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하다거나 통계 수치 따위는 지적인 밑장 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데는 당연히 정확한 숫자가 필요하다. 나는 다만 통계와 클로즈업이(그리고 이렇게 부를 수 있는 모든 활동이) 건축으로 치면 설계와 감리 같은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일련의 숫자에 사회의 현실을 대변하는 자격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숫자의 실체를 직접 확인하고, 말하자면 ‘냄새를 맡아 볼 의무'가 있다. <고기로 태어나서 /한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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