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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Dec 16. 2021

원시

#원시(遠視)

한참 들여다 봤다.
"흔히들 어른이 없다고 합니다. 이 시대에 보고 배울만한 참다운 어른이 없다고 합니다..... ‘어른’은 ‘어르다’는 말에 과거형 어미 ‘ㄴ’이 붙어서 이루어진 말입니다. 어르는 과정을 이미 다 마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어르신’은 여기에 상대를 존대하는 ‘시’라는 말이 추가된 것입니다.
‘어른’은 평칭이지만, ‘어르신’은 존칭입니다. 그래서 어른은 이미 혼인한 사람, 요즘식으로 말하면 품절남, 품절녀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인 새로운 이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와 하나가 되면서 어른이 되어갑니다. 아내의 집안, 또는 남편의 집안과도 남이 아닌 관계를 형성합니다. 또 다른 인격인 자녀들을 낳아 기르면서 그들을 배려하고 함께 공감하며 살아갑니다.
어른이 되는 과정은 결국 타자인 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들을 배려하고 그들과 공감하며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남과 온전히 소통하고 공감하고 배려하는 능력을 가진 자’, ‘참으로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느낄 줄 아는 인격’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어른이 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르신들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허원기>"

참다운 어른이 없다는 얘기, 많이 듣고 있고 공감한다.
정말 그런가? 왠지 '시대'란 낱말이 서걱거리며 씹힌다. 시대, 나라, 학계, 문학계, 정치권 이런 한정적인 수사를 뺀다면 어떨까?
거창하고 그럴듯한 수사로 존대해야 할 '어른'들만 찾느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광주선생님은 국어를 가르치신다. 시골 중학교에 계실 때 제자가 내 친구다. 남들은 퇴직한지 오래 된 지금까지 학원을 운영하고 계신다.
친구는 젊은 나이에 주례를 섰다. 선생님의 아들 결혼식이었다. 아들과 며느리는 최고 학부를 나오고, 둘 다 고시에 패스한 보기드문 재원이다. 그럴 듯한 '어른'들이 주변에 많았을 것은 자명하다. 지도 교수, 학장, 장,차관인들 주례로 모시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손사래를 치는 제자를 주례로 세웠고 아들 부부까지 가세했다. 당신의 말을 애제자 입을 통해 전달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어른이 된 제자에게 어른이 될 자식을 맡긴 것이다. 보기 드문 아름다운 그림이다.

내 결혼식의 주례는 고교 은사이자 선친의 친구이신 선생님이셨다. 말썽 피우고 천방지축이었던 내 고교시절을 지켜보신 분이다. 내가 모시고 싶은 '어른'이었다.

몇달 전 친구누 선생님 댁에서 나눈 대화 중에 나온 '사전'에 관한 얘기가 감명 깊었나보다.
나 역시 한국말 사전의 종류가 그렇게 많다는 걸 이전에는 몰랐다. '사투리 사전'  '속담사전' '꽃말 사전' '욕 사전'까지 있다고 하셨다.
어제 친구가 강의 자료를 만들며 선생님 서가에 꽂힌 사전류의 사진을 요청했다. 친구가 세어 본 모양이다. 48종이라고 했다.
선생님은 사진과 함께 이런 문자를 보내셨다.

"사전류를 한쪽으로 모으면서 떠오르는 옛날 생각들, 책의 권 수가 문제가 아니라 어휘나 개념어 하나일지라도 머릿속에서 개운하게 해결되지 않을 때 괴로움을 해결해 준 소중한 벗들.
책 이름을 알아보고, 구입이 가능한 책인지 기다림 또한 즐거움일 수밖에, 그렇대 한 권 한 권. 그러다보니 시 속에 나타난 한(恨) 때문에 두견새 소리가 담긴 테이프도 찾고, 억새와 갈대를 구별하는 그림도 찾고, 모란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말만으로 전하기는 더욱 어려워서 카메라에 담아 오기도 하고....
시골 가게에서 만난 돌쩌귀도 얼마나 반가웠는지.
요즈음이야 인터넷이 있어서 세련된 손가락 놀림 몇 번이면 모든 궁금증이 풀리는 세상이 아닌지. 하지만 그러한 상황이 사람의 생각까지 얄팍하게 하지 않는가 싶기도, 주문한 책이 오기를 기다리는 즐거움을 맛볼 수 없으니....."

국어 성적보다 인성을, 의대보다 의사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시는 선생님
시어 하나를 설명하기 위해 열매를 가져와 손에 쥐어주고, 사진을 찍어 보여주시는 아직 청년인 어른.
세상에 어른은 많다. 우리 눈이 TV와 신문에만 꽂혀있고 흐려질대로 흐려져 가까이 있어도 보지 못할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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