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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Dec 25. 2021

근조(謹弔)

낮술을 먹었다. 제법 먹었다.
기독교 집안이 아니었던데다 눈도 보기 힘든 지방 출신이라 성탄 특집 영화와 캐롤로만 기억되는 크리스마스다.
비록 선물을 주고 받지는 않았지만 괜히 들뜬 마음, 흥겨운 기분으로 누구에게나 “메리 크리스마스!”쯤은 예사로 건넬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크리스마스는 끔찍하다.

스무살 넘은 자식을 때려서 훈육시키는 애비는 탈레반 같은 '원리주의자'다. 새벽 이슬로만 밥을 지어먹고, 용변은 왼손만 써야 하며 여자는 회초리로 다스린다.
거센 폭풍우 속에서도 집이 무너지지 않게 기둥을 붙들고 있는 가장은 '원칙주의자'다. 기둥은 가장으로서 의무고 책임이며 약속이다. 더 나아가 한 사회를 지탱하는 원리이고 원칙이며 규범, 질서 같은 것이다.

나는 문재인이 원칙주의자라고 생각했다.
나라의 기둥을 놓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전례없고 비상식적인 검란의 회오리 속에서도 검찰청장의 임기를 지켜주려 한 것, 우격다짐으로 맞지도 않는 구멍에 채워 넣는 단추였던 국회의원들의 장관 임명까지도, 그렇게 꾸역꾸역 목구멍에 고구마를 쑤셔 넣었다.
법으로 임기를 보장했을 때는 분명한 이유와 원리가 있다고, 정치적 고려와 시스템에 의한 인사 검증까지 마친 대통령의 고유한 임면권이라고 이해하려 무지 애썼다.

그렇다면 사면권도 대통령의 고유권한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맞다. 조두순이든 박근혜든 누구든 법적 요건만 갖추면 사면할 수 있다. 그게 원칙이다. 그런데 조두순은 개과천선한 곱추가 되더라도 안될 것이고, 박근혜는 늘 건강상태를 돌보다가 허리만 아파도 사면된다는 게 문제다. 감방에는 기약없는 사형수들, 아무리 아파도 병원 한번 갈 수 없는 기결수들이 넘쳐난다.
원리를 따져 묻지 않으면, 원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법전의 목차만으로 충분하다.

몇 백억 횡령한 재벌회장은 휠체어를 타고 법정에 출두했다가 병원으로 이송되고, 빵 몇 조각 훔친 가난한 집 가장은 대역죄인처럼 고개도 못들고 출두했다 교도소로 끌려간다.
재벌 회장은 개인축재가 경제기여로 둔갑해  감형되어 특사로 나오고, 가난한 집 가장은 직업교육을 받고 만기출소해도 일자리에서 쫓겨나기 십상인 게 현실이다.

이래서는 안된다고 국민들은 분노하고 울부짖었다.
무슨 말씀인지 새겨 듣겠노라고 공정한 나라 만들 테니 믿어 달라고 우리의 바지 끄댕이를 잡아끌었던 게 바로 당신들이다.
당신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얻은 지지였나? 당신들의 능력으로 출범한 정부인가?
우리의 시린 손으로, 천만 촛불을 비춰서 마련해 준 무대였다.

왜 삼백 어린 생명을 차디찬 바다에 수장시킨 대통령은 풀려나고, 먹고 살기위해 졸음운전으로 사망사고를 낸 가장은 긴 겨울을 몇번이나 더 나야 하는가?
의무는 다른 사람들의 정당한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우리 사회를 지속시키는 규범이다.
대통령은 국민의 정당한 요구에 충실하게 복무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다면 왜 이 신성한 의무를 지키지 않은 대통령은 사면되고, 의무와 무관하고 약속도 하지 않은 강남부자 아줌마는 풀려나지 않는가?
당신은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늘 정치인과 판검사, 기자에게만 관용을 베푼다. 재벌처럼 형량을 돈으로 사지 않는데도 관행처럼 혹은 불문율처럼 지켜진다.
정치인은 늘 사면을 전제로 감방에 들어가고, 판검사는 죄를 짓지 않는 완전무결한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으며, 기자는 무한대의 언론자유를 누리며 사는 나라인 것이다.
누구도 공인하지 않은 이 엘리트 카르텔은 합법적 불법과 비리를 저지르며 부패하는 것이다.
이 부패의 온기마저 그들만이 쬐면서 차가운 감방은 헐벗고 굶주린 국민들로 채우는 것이다.

정치공학이라고 했는가?
당신은 법대를 나오고 나는 공대를 나왔다. 당신은 술수공학이 전공선택이었지만, 나는 민심공학을 전공필수로 들었다.
공학의 기본은 같은 인자를 투입했을 때 똑같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원칙을 지키지 않는 정치가 어떤 후과를 가져올 지 두려워해라. 원칙을 투입하지 않았는데 상식에 부합하는 결과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의무를 저버리고 국민을 배신하고서 좋은 결과를 바란다면 썩은 씨앗이 싹트기를 바라는 것이다.

대선을 앞둔 고심의 흔적이라고 미화한다.
당신과 당신의 무리들이 창출한 정권이었던가?
착각하지 마라. 당신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안겨줬던 게 아니다. 짐을 지운 것이고 도구를 쥐어 줘서 농사를 시킨 것이다. 그토록 애원하던 선물이고, 반드시 수확으로 보답하겠다고 해서 믿고 맡긴 것이다.
민심은 천심이다. 하늘의 비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민심의 우박은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 당신은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
못한 것이 아니라 안한 것이다.
우리는 세계 어느 나라 국민보다 더 코로나 방침을 잘 준수했다. 안경에 습기가 차고 의사소통이 불편해도 어린아이까지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임대료가 밀리고 빚을 내 월급을 주면서도 시간에 맞춰 간판 불을 내리고 손님을 내보냈다.
정부의 방침을 따르고 행정명령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국민으로 지켜야 할 의무이고, 사람 간에 지켜야 할 원칙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칙을 지킨 국민이다.

당신은 원칙을 저버린 대통령이다.
적어도 노무현은 원칙이 무엇인지를 알고 원칙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었던 사람이다. 국민이 지운 의무를 마지막까지 내려놓지 않았고, 사람의 원칙을 끝까지 지킨 사람이었다.
당신은 노무현의 친구가 아니다. 노무현은 죽어서 영원히 살았고, 내가 알던 문재인은 살아있으되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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