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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Jan 19. 2022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며 - 3

"나로 인해 동료와 고객이 한 명이라도 발길을 돌린다면 어떤 것도 정당성을 잃는다! 저의 자유로 상처받은 분이 있다면 전적으로 저의 부족함입니다."
최근 논란을 일으킨 한 대기업 CEO의 글을 대하면서 묘한 굴욕감을 느낀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를 살피는 성찰도 없고, 뉘우침도 느껴지지 않는다.
주판알을 튕긴 손익계산과 자신의 자유를 침해당했지만 용납하겠다는 오만함만 느껴질 뿐이다.  
 
우리는 대부분 어른이 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가르쳐주는 어른도 없었다. 아주 어릴 적에는 어른이 설날이나 추석처럼 때가 되면 ‘찾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대여섯살 무렵의 나는 선친이 재직하는 학교 운동장에서 놀기를 좋아했다.
“임마 이거… ㅇㅇㅇ샘 아들 아이가?”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데 수박만한 대갈통 세 개가 눈 앞에 나타났다. 새카만 교복의 코밑이 거뭇한 까까머리 고등학생들이었다.
“너그 아버지 ㅇㅇㅇ샘 맞제?”
“예. 맞는데예”
“푸하하하”
선친과 닮았다고 나는 ‘붕어빵’으로 자주 불렸다. 그들은 부자지간의 줄긋기를 맞춘 것이 내심 즐거웠는지 한바탕 웃고서는 꽤 오랜 시간을 나와 놀아줬다.

그들이 낯선 사이로 만나 놀아 준 최초의 남자어른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우리집에서 선친과 마주앉은 그 남자어른들은 나와 같은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학교를 졸업해야 비로소 어른이 되는 거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수업시간표에도, 대학교 커리큐럼에도 ‘어른’과목은 없었다. 졸업장이나 자격증처럼 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시간의 계단을 오르면서도 ‘아 여기서부터 어른이구나’하는 결정적 구간이 없었다. 그냥 슬며시 어른이 되어있었다. 내가 선언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어른이라고 명명한 것 같았다. 마치 사랑이 뭔지 알기도 전에 아이 먼저 출산한 미혼모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어른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고 지금도 통과의례 중인 것은 아닌지 미심쩍은 것이다.

어른에 비하면 남자가 되는 통과의례는 좀더 극적이고 구분이 선명했다.
내 경우에는 군입대였다. 사춘기의 성징이 생물학적인데 비해 군복무는 원시적 형태가 남아있는 육체적, 정신적 통과의례였다.
성년이 되는 통과의례는 단절과 고통, 죽음과 탄생을 거쳐야 한다. 익숙하고 편한 것과의 단절, 부당한 권력과 억압에 의한 정신적 고통 그리고 반복된 단련이 가하는 육체적 고통을 통해 개인으로서의 나는 죽고 집단의 일원으로서 나로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성당이나 불가에서 새 이름을 받거나, 개신교에서 침례를 해서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것과 흡사하다

알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게 아니라 알껍질이 깨지는 바람에 비집고 나온 병아리가 되는 것이다. 태양인 나를 중심으로 도는 우주인줄 알았다가 고작 내가 작은 행성이나 인공위성에 불과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충격은 각성이라고 해도 무관할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고된 훈련 직후에 ‘어머니 은혜’를 부르게 한 것은 어머니에게 이별을 고하고 정신적 분리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별은 슬프고 분리는 아프다. 그래서인지 교범에 없을 이 과정에서 울지 않는 장정들이 없었다.

남자가 되는 통과의례의 방식과 내용은 주변환경이나 개인적 경험에 따라 각자 다르지만 수컷끼리는 냄새로 통과여부를 알 수 있다.
어떤 식이든 통과의례를 거쳤다면 존중하지만, 아닐 경우에는 인정할 뿐이다.
여기서 존중과 인정은 가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남자가 되기보다 어른이 되기가 더 어렵다.
그래서 집단이나 국가는 어른이 리더가 되느냐 아니냐로 존망이 갈린다.
통찰과 식견을 갖추고 삶의 깊이가 있는 진정한 어른은 나이나 성별과는 무관하다.
남자가 되지도 못한 채 유아기에 머무는 사람들이 리더가 되고, 최고 지도자에 오를 수도 있는 현실이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 세대에서나 통했을 “군대를 갔다와야 사람이 된다”는 고리타분한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어차피 핸드폰으로 수시로 가족과 연락을 주고받고, 고작 계절이 한번 바뀔 뿐인 짧은 지금의 군복무에서 옛 성인식의 흔적을 찾아보기란 어렵다.

다만 남자도 어른도 못된 사람들이 함부로 내뱉는 말들에 신경이 거슬리는 것만은 어쩔 수 없다. 기본적으로 어른 남자는 타인을 존중하고 몸가짐도 진중하다.
물론 군대를 안다녀왔다고 수십년전 표어에서나 나올 법한 ‘멸공’을 부르짖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런데 멘트는 맥락 없는 개그맨의 대사처럼 뜬금없고, 저변에 깔린 의식은 만두피보다 얄팍하다. 이에 화답하듯 유력 정치인은 멸치와 콩을 쇼핑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50대 대기업 오너에게서는 철봉에 매달려 묘기를 부리던 치기어린 어린애의 젖비린내가, 60대 정치인에게서는 갑작스레 커진 덩치를 주체 못하는 사춘기 소년의 비릿한 땀냄새가 난다.
그들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미심쩍은 군미필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시대가 지난지가 언제인데 “멸공”구호를 외치고, 전시작전권의 개념도 이해못하면서 공멸을 불러 올 “선제타격”을 주장한다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징집을 회피한 트럼프와 군 경력도 없는 볼튼이 전쟁을 불사하던 강경한 매파였다. 그들은 남자도 어른도 아니었다. 그런 자들이 권력을 가지게되고 지도자가 됐을 때 나라와 세계는 혼란스럽고 위태로워 진다.

100만원짜리 수표를 들고 문방구를 찾는 천방지축 부잣집 어린애와 총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는 바보형이 한 동네에서 한 편이 되어 노는 건 위험천만하다.
서로 맞바꿀지도 모르고, 영악한 어린애의 사주를 받아 바보형이 대형 사고를 칠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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