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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Jan 19. 2022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며 - 4

“살다 보니 진실이 두가지가 있을 때도 있습디다” 영화 <모가디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다.
이 대사를 들었을 때 거의 동시에 떠오르는 또 다른 대사가 있었다.
“자네가 이기면 정의는 승리해. 하지만 자네가 져도 정의는 승리하지” 영화 <타임투킬>에서 나온 대사다.

우리는 흔히 ‘진실’은 하나이고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고 배웠고 믿는다. 그런데 두가지가 될 수 있는 진실과 정의를 정의할 수 없는 현실 앞에 혼란스럽다.
배경 설명이 뒤따라야 한다. 전자는 냉전시대 첨예한 남북대결구도의 외교전에서 '있는 그대로의 진실'과 '믿어야 하는 진실'이 존재하는 상황을 묘사한다. 극단적으로 다른 경험을 하고 그 경험이 진실인데다 심오하다면 두개의 진실은 존재할 수 있다.
후자는 약과 술에 취한 백인들이 10살 흑인소녀를 성폭행하고 살해하려던 사건이 벌어진 미국의 한 시골마을이 무대다. 백인우월주의가 팽배한 그 지역에서는 유죄판결을 기대하기 힘들다. 소녀의 아버지는 범인들을 쏴서 응징한다. 그의 변호하게 된 주인공에게 스승이 해준 격려같은 조언이다.
현실적으로 이미 유죄를 단정하고 있는 백인 배심원들로만 구성된 재판정에서는 이길 가능성이 없다. 차별받는 흑인들의 검은 정의와 살인행위를 단죄하려는 백인들의 하얀 정의.
법정에서 어떤 판결이 나더라도 누군가의 정의는 승리한다. 다만 그들의 피부색처럼 컬러만 다를 뿐이다.

영화 007시리즈가 중단될 거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온지는 오래됐다. 냉전시대의 유산인 원작을 현대에 우려내는데 한계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무덤 속에서 멸공 좀비가 기어나오고, 옛날 이야기속 뒷간 귀신이 내민 종이처럼 빨간색과 파란색 정의가 존재한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된 기분이다. 좀비야 밝은 태양아래에서는 맥을 못추듯 평화가 깃들면 사라진다. 하지만 두 개의 정의가 문제다.
영화<타임투킬>의 현실판인 것이다.

영화 속 백인으로만 구성된 배심원과 재판관처럼 우리 사회는 부와 권력을 가진 소수의 기득권층이 언론, 검찰, 법조계를 장악하고 있다.
그들이 어제의 정의를 오늘에 와서 부정하고 정의를 정의하는 실재 힘을 가진 것이다. 법정 밖에서 피켓을 든 보수와 진보로 나뉜 군중들의 분노와 함성은 법정 안으로 파고들지 못한다.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이 초등학생이 고자질하듯 걸핏하면 고소 고발을 남발해서 자신들의 위신을 깎아내리고,
탈법과 불법을 엄단해야 될 검사들은 고대의 소도인 검찰청 안에서 온갖 거짓과 조작, 부정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선택적 정의에 실현한다.
악어의 이쑤시개 노릇을 하는 악어새처럼 검찰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고 세경 주는 주인의 하명에만 충직한 기자들에게 언론의 자유는 면죄부나 다름없다.
과거 정권과 결탁하고 거래를 튼 사법농단과 잇단 고무줄 판결이 보여주듯 사법부는 이미 청정지대가 아니다.
그런데 그들은 소수지만 힘이 세고 변화를 바라지 않으며 결코 그들이 쥔 것을 내려놓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매한 국민을 현혹하고 호도할 수단을 지녔으며, 협박하고 제압할 무기까지 지녔으니 두려울 것이 없다. 그래서 그들의 정의는 힘없고 변화를 갈망하는 수많은 가난한 민초들의 정의와 융합되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나라는 흑백갈등 대신 좌우대립과 빈부갈등 그리고 개혁과 반개혁 진영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휘말아치는 소용돌이 속에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타임투킬>에서 살인범이 된 소녀의 아버지 칼리가 무죄 평결을 받을 수 있었던 세가지 요인이 있다.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닌 백인 변호사 제이크를 선임한 것, 그는 온갖 핍박과 위협을 감수하면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자신도 딸이 있기에 칼의 행동을 이해하고 석방해야 한다고 했던 경관의 증언, 그는 칼의 총격에 불구가 됐다. 그리고 배심원들의 눈을 감게 한 후 소녀의 성폭행 당시 상황을 떠올리게 한 제이크의 마지막 변론이다. 그는 “자, 이제 그 소녀가 백인이라고 상상하십시오.”라는 결정타를 먹인다. 꿈쩍도 않을 것 같던 배심원들의 감은 눈에 눈물이 고인다.
제이크는 배심원들을 피부색을 떠나 같은 인간이자 아버지로 공감하게 만들었고, 그들을 법전에 명시된 정의가 아닌 양심에 귀기울인 정의의 편으로 돌려세운 것이다.

제이크의 마지막 변론이 있기 전 두번의 위기 상황이 있었다.
맞수인 검사 버클리는 악랄한데다 정치적 야심을 가진 보수주의자다. 그가 칼측 증인인 정신과의사의 과거 미성년자 강간 전과를 들어 증언의 진정성을 의심받게 만든 것이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려는 의사의 진술을 가로막고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게 다그친 결과다. 이어서 검사는 교묘하고 자극적인 유도 심문으로 칼을 몰아부쳐 감정이 격해진 칼이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게 만든다.
그런데 제이크는 당시 그 의사는 열아홉 살, 여자는 열일곱 살, 둘은 진정으로 사랑했으며 출소한 뒤 결혼하여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의사는 법은 어겼어도(guilty) 죄(sin)는 없다’는 말로 배심원들을 흔들 어놓는다.
진실도 가리운 장막을 걷으면 두가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칼이 자신의 실수로 지금까지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상황에 낙담한  제이크에게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들 눈엔 넌 백인이고 난 흑인이지. 흑인 식당에서 밥을 먹고 흑백 평등을 주장해서 헷갈리나본데 실은 너도 그들과 똑같아. 너도 나를 볼 때 인간이 아닌 흑인으로 본다고….. 배심원들과 같은 눈으로 보라구. 법의 시각 따윈 집어치우고. 네가 배심원이라면 무엇이 나를 석방하도록 설득하겠는지 보란 말이야”
칼은 제이크에게 법의 시각이 아닌 인간의 마음으로 호소하고, 마주보는 대립된 위치가 아닌 그들과 같은 자리에 서 보라고 주문한 것이다.
칼은 사안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제이크는 사람을 읽는 감성과 지적 수준이 높은 변호사였다.

나는 뼛속까지 서민일 수 밖에 없는 변호사 출신의 탁월하고 유능한 정치인을 두고서도, 악랄하고 무지하며 사적 욕망에 사로잡힌 부패한 검사를 지지하는 국민을 이해하기 어렵다.
선택적 정의와 범죄를 선별하고 제조까지 하던 검사에게 그들이 기대하는 정의는 과연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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