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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Jan 13. 2022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며-2

누구나 인정하다시피 우리는 남녀, 세대를 불문하고 세상 속에서 입은 상처 하나쯤은 다들 지니고 살아간다.
나는 남자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어차피 여자는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한 성역할이나 성차별에 있어 여자는 남자보다 훨씬 훌륭한 태도와 대단한 용기를 지녔다.
남자들은 자신을 둘러싼 어둠과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아픔과 고통에 맞서 투쟁을 중단하지 않는 여자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은 모두의 문제이고, 모두를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남자를 이야기하는 것은 곧 우리 이야기다.

내가 성인이 되면서 정확히는 아빠가 되면서 공부한 가장 놀라운 발견은 출산의 정의였다.
어머니가 낳는 것이 아니라 아기가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도와줄 뿐 아기 스스로 자기 몸을 젖은 빨래처럼 쥐어짜면서 퇴변을 뱉어내고 좁은 산도를 통과하는 과정이 산통이라는 것이었다. 왜 아기는 아늑하고 편안한 자궁에서 낯설고 불안한 바깥 세계로 나오려 애를 쓰는 것일까?
나는 어두운 분만실에서 질린 듯한 파아란 핏덩이를 안고서야 문득 깨달았다.
‘너는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온 거구나’ 운이 좋아서 딸과 아들이 2년 터울로 태어났다. 딸은 기다리던 크리스마스 선물, 아들은 누군가 보낸 택배상자를 받아 든 느낌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내가 그랬듯 아버지는 상자를 열어 나를 어떻게 조립할지 고민하고 용도가 무엇일지 궁금해하셨을 것이다.
남자는 모태에서 떨어져 나오며 상실과 공포를 경험한다. 탯줄이 가위로 짤리는 순간 어머니와 생물학적으로는 분리되고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세상의 공포와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 트라우마는 평생을 지배한다. 앞으로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몇 가지 사실 즉 세상이 지우는 책임과 의무을 감당하며, 적응하고 타협하겠다는 계약서에 자기도 모르게 싸인한 것이다. 어두운 자궁에서 탈출해서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라 따가운 태양에 눈쌀을 찌푸리고 자유에 족쇄를 채우는 과정이다.
어머니의 자궁 속을 유영하던 아득한 과거가 자유롭고 행복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구속과 억압, 고통은 잊혀지지도 않고 상처를 남긴다. 나는 아직도 어머니에게서 자유의 냄새를 맡고 세상이 할퀸 상처가 아무는 것을 느낀다.  
 
내가 아버지를 보호자가 아닌 같은 남자로 느꼈던 첫 기억은 초등학교 5학년 즈음이었다. 뭇 아버지들처럼 당신 역시 처음으로 나를 목욕탕에 데리고 간 날, 그날의 뿌듯함으로 동류의식을 느꼈을지 모르지만 자식인 나로서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장난을 치다가 내 발차기에 동생이 유리창을 깨고 넘어졌다. 어린 우리로서는 수습하기 벅찬 사고였다. 찢어진 동생의 팔꿈치보다 깨진 유리창이 더 걱정스러웠고 후환이 두려웠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는 동생 팔꿈치에서 흐르는 피에 기함을 하며 내 등짝을 후려치셨다. 그런데 아버지는 오히려 담담하셨다. 슬쩍 둘러보고서 깨진 유리창부터 주워 담으셨다. 그리고는 아픔보다 공포로 울음을 꾹꾹 다지던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그렇게 칭찬 비슷한 말씀을 하고서 동생을 어머니와 병원에 보내셨다. 치도곤이 당연했던 그 날의 사고는 그것으로 일단락됐다.
내게는 이유도 묻지 않으셨고, 야단을 치지도 않으셨다. 동생은 여러 바늘을 꿰매고 사뭇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어쩌면 나와 동생은 동물 수컷들이 그러하듯 야생 적응훈련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채 여물지도 않은데다 자라면서 뒤로만 휘어져 머리를 두 다리 사이로 처박아야지만 그나마 쓸 수 있는 초식동물의 뿔을 연마하던 중이었던 것이다. 그 아름답고 크게 자랄 뿔이 생존에는 별 소용이 없을 지라도 말이다.
아마도 어른 수컷인 아버지는 그 사실을 알고 계셨기에 두고 본 것이고 책망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것이 현대사회에서 사라진 특징 중 하나인 성년의례를 대비하는 초급단계의 훈련쯤으로 생각하게된 것은 근래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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