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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Mar 14. 2022

나도 외계인일지 모른다

엄마와 통화를 했다.

"엄마"

세상에는 엄마라는 인간과 구분되는 신과 인간 사이 어디 어디쯤에 존재하는 인종이 사는 것 같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엘프같은 종족 말이다.

나는 가끔 엄마의 젊은 날을 흑백사진으로 만난다. 거기에는 엄마 닮은 여자가 서있다. 내 기억과 현재의 엄마 모습은 한결같이 똑같다. 분명 당신 자식으로 50여년을 살았는데 나는 엄마의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영화 속 엘프처럼 영원히 곁에 계셔주셨으면 좋겠다.


"응. 오랜만이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마치 전화기 옆에 대기하고 있다 받은 목소리다. 엄마의 '오랜만'은 타박이 아니라 걱정이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전화를 못했냐'는 의미다.

오늘 날아온 고향 친구의 모친 부고를 전해드렸다. 고향 동네분이니 당신도 아셔야 할 것 같았다. 예상을 하고 계셨던지 그다지 놀라시지는 않는다.

"장례식장이 어디드노?"

"김포던데..."

"그라믄 ㅇㅇ 이가 요양원에서 모셔왔는갑다"

정작 나는 친구 어머니가 그동안 요양원에 계셨단 건 몰랐다.


언제나 그렇듯 세상의 엄마들은 자식의 모든 걸 다 알고있다. 이어서 나는 사무실을 옮겨야 하는 저간의 상황을 전했고, 엄마는 숙모와 이모 성화에 4월에는 며칠간 여행을 다녀와야겠노라 말씀하셨다.

간략한 설명만으로 엄마는 명의(名醫)가 되어 정확한 진단과 처방을 내린다. 건물주의 안부를 물으시곤 반드시 인사를 가야한다는 당부에서부터 내가 하지도 않은 건물 매각의 속사정까지 얼추 정확하게 꿰뚫는다.

코로나 이후 근무형태의 변화로 요즘 시대에는 사무실이 예전만큼 중시되지는 않지 않느냐는 말씀도 하신다.

그리고 정작 내가 어떤 심정일지 읽어내며 다독여주신다. 30분 통화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신다. 나름대로 감정을 잘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강바닥 진흙처럼 뿌옇게 떠올랐다가 이내 가라앉는다. 훨씬 편안해진다.


전화를 끊고나서야 응당 물어보셨을 말씀이 없었다는 걸 깨닫는다.

당신이 일부러 그러셨다는 걸 안다. 대선 결과로  내 마음이 어떨지 이미 알고 계시다. 그래서 평소같으면 이미 전화하셔서 "야야 세상이 우찌 될라꼬 이리 됐노 그쟈" 하고도 남았을텐데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엄마는 참으로 대단한 존재이고 사랑이다. 신을 찾고 싶을 때 그곳에 엄마가 있다.


대선 관련해서 주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얘기를 꺼내고 내게 묻기도 한다.

내가 먼저 이 주제를 대화 소재로 올리는 일은 없다. 아무렇지 않은듯 담담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실은 아무렇지 않았던 게 아니다.

20년 전 회사에 사표를 내게 만들었던 부정맥 증상이 나타났다. 당시 몇개월에 걸쳐 극복한 이후 야근은 물론 스트레스까지 조절하면서 관리해오고 있다. 간혹 피치 못할 스트레스가 가해지면 미세한 시그널이 온다. 일을 하다가도 멈추고 하던 생각도 지워버린다. 부정맥을 앓아본 사람들은 안다. 부정맥은 신체적 고통이 아니라 심리적 공포 때문에 무섭다.  


지난 몇 개월동안, 이유를 댈 순 없지만 이재명의 당선을 확신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비가 땅에서 솟구쳐 하늘로 오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결과는 내가 아는 상식과 사유의 차원을 가뿐히 넘어버렸다.

그날부터 대선, 투표, 민주당, 국힘당, 이재명, 윤석열, 김건희까지 대선과 관련된 단어로 촉발되어 깊은 생각에 빠져 들다보면 부정맥의 전조현상이 나타나곤 했다. 심장박동이 미세하게나마 불규칙하게 뛰는 것이다.

내가 현실을 빠른 시일만에 담담하고 차갑게 받아들이고긍정적인 생각과  낙관적인 태도를 취하려는데는 이런 나름의 사정이 있는 것이다. 누구나 아무렇지 않은 사람은 없다. 청춘이 아니라도 아플 수 있다.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세상에 무관심하지 않다면 어떻게 지금의 상황이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각자의 방식으로, 걸리는 시간은 다를지라도 자신을 다스리는 수밖에는 없다. 이번 대선을 계기로 정치 고관여층이 되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든 최선을 다해 그리고 마음이 기우는대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외에는 답이 없다. 나는 나만의 절박한 이유가 있어 흥분하거나 맥을 놓고 비탄에 빠져들지 않으려 했고 평상심을 빨리 되찾아야만 했다.


"질문은 하는 것이 아니라 품는 것이다"

나는 박문호박사의 이 말을 좋아한다.

인터넷이 인간의 신경망처럼 뻗어있는 세상에서는 질문만 입력할 줄 알면 답변이 곧바로 튀어나온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알 수 있는 진짜는 없다.

내 안에서 질문을 키우고 반복해서 하는 연습이 중요하다. 채굴하듯 내 안에서 찾은 답만이 가치가 있다. 컴퓨터가 혹은 누군가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정답이 아니라 또 다른 질문일 때가 많다. 한영사전이 아니라 영영사전이라고 보는 게 맞다.

쉽고 간단하게 얻은 답은 쉽고 간단한 질문이어서 그렇다. 질문이 무거울수록 정답에 가까워지고 . 질문이 깊을수록 이해의 폭은 넓어진다.


원하지 않아도 AI가 인간을 분류하고 취향과 성격까지 파악해 줄을 세운다.

내가 알지 못하거나 접근하기 어려운 다른 차원의 인간과 사회,  그 속의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사는 편이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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