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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Jun 04. 2022

오호라

오늘부로 특별시민에서 도민이 됐다.

그동안 회사 주소였던 주민등록지를 집으로 옮긴 것이다.

구한말 일제강점에 비분강개한 선비들은 치욕적인 일본 신민으로  살 수 없다며 목숨까지 끊었다.

임시직일 줄 알았던 오세훈이 마침내 정규직 시장이 된 서울시민으로 살아갈 바엔 차라리 김동연이 도지사인 경기도민이 되겠다.(는 뭐 그런 고매한 의지가 있어서는 아니다)


전입신고를 하는데 세대주의 신분증과 도장이 필요하단다.

하루만에 귀찮은 제반 수속을 끝마치고 싶어 현 세대주께 전화를 올렸다. 친히 주민센터까지 오시겠다고 하셨다. 세대주의 협조로 무사히 전입신고를 마치고 주민등본을 떼서 세무서로 가야했다.


마침 세대주인 아내의 약속장소와 방향이 같아서 차를 얻어탈 수 있었다. 운전하던 아내가 그랬다.

"여보 우리 1박으로 캠핑 갈까?"

"(반색하며) 그래. 나야 좋지. 그럼 내일 떠날까. 애들도 데리고...."

나의 모토는 '쇠뿔도 단김에...'다.

"안돼. 나 내일 약속 있어. 날은 잡으면 되지. 근데 타프가 있어야 되잖아"

직전 캠핑 때 비가 새서 오래된 타프는 미련없이 버렸다.

"ㅇㅇ이(동생)가 준 텐트는 거의 새거야. 비 안새 걱정 마"

여기까지 대화가 오갔을 때 내려야 할 지점에 도착했다. 나는 세무서에서 남은 수속을 밟고 사무실로 갔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나는 사무실에 도착한 후로 장시간 (거의 한시간 넘게) 인터넷 서칭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흠칫 놀라고 말았다.

'타프' '타프 추천' '좋은 타프의 조건' '가성비 좋은 타프' 가 검색어다. 어느새 쇼핑몰 장바구니에는 뽑히기만을 기다리는 타프 후보군들이 쌓여있었다.


아내는 단지 "타프가 있어야 되잖아"라고만 했다. 더구나 그녀는 캠핑 갈 날을 꼭 집어 점지해 주지도 않았다. 그런데 나는 혹시나 타프 불비로 인해 그녀의 심사를 거스르게 될까봐 타프 구입을 위해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에게나 아내는 선한 인상의 호감형이고 나는 날카로운데다 성깔있어 보인다는 평을 듣는다. (외모지상주의는 인류 공영의 적이다.)

우리 부부와 알고 지내는 지인들은 한결같이 내가 전생에 지구를 구했다는 둥, 착한 아내가 다 받아줘서 내가 내멋대로 한다는 둥 속모르는 소리를 한다. 물론 나 또한 그럴때마다 손사래치지도 않고 은근히 즐기는 편이었다.(어리석고 어리석었도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아내가 스쳐지나듯 흘리는 말 한마디로 나를 거북목이 되도록 타프 구매에 전전긍긍하게 만든 것. 이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가스라이팅'인 것이었던, 것이었다.


#가스라이팅 #무서븐_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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