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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Jun 19. 2022

뒈지면 늙어야지

"당신이 없었거나 당신 아는 사람들 안만났으면... 나 오늘 사고쳤을 거다."

"왜?"

"그 영감탱구리 말이야. 아까 공연장에서..."

"아...!"

웅어회에 막걸리를 마시던 중이었다.


공연의 마지막 순서는 인디가수 공연이었다. 사회자가 가장 먼저 와서 리허설을 했는데 마지막 순서가 됐다고 미안스레 소개를 했다.

인디문화계 사람들은 고집스럽고 철저한 면이 있다.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지키려면 그럴 수 밖에 없다.

세상의 유혹에 당당하고 쉽사리 타협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대개는 궁핍하고 고되지만 행복하고 순수하다.


개인적으로 인디밴드나 인디가수 그리고 그들 음악에 무한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

정말 사랑하고 환장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이다. 자신만의 음악세계 그 돌탑을 묵묵히 쌓아올리는 수행자같은 뮤지션이 바로 그들이다.

그래선지 나는 자꾸 '인디'라는 단어에서 고유한 문화가 사라져가는 중남미 원주민인 인디오의 '인디'를 떠올린다. [ 물론 아니다 인디문화의 인디(Indie)는 자본으로부터 독립적(Independent)이라는 뜻이다.]


다른 공연자들은 3곡 정도를 하고 앵콜송 한 곡을 불렀는데 이들은 5곡을 불렀다.

그 해프닝은 세번째 곡이 끝났을 때 점화됐다. 건너편 객석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아내에게 물었다.

"뭐라는 거야?"

"응. 트로트 부르라고..."

가수가 웃으며 그렇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넵. 근데 트롯은 TV에서 많이 들으시잖아요. 조금 더 일찍 오셨으면 다른 가수들 트로트 들으셨을텐데....."


아무래도 자주 듣던 대중가요가 아니라서 낯설 수 있다. 싱어송라이터로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고 싶었겠지만 그런 요청이 분명 처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럴 수 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또 뭐라고 소리친다. 아마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화를 내는 것 같았다.


네번째 곡을 불렀다. 역시 트로트가 아닌 자신의 곡이다. 노래가 끝났을 때 또 건너편이 웅성거린다. 트롯을 요구했던 그 중늙은이가 뭐라고 소리치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것이다. 여봐란듯이 씩씩대며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그 순간 내 엉덩이가 살짝 허공에 뜨는 걸 느꼈다.

'저 늙은이가  그냥... 확 한 따까리를 해? 아니다.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그런 자리가 아니란다. 이제 니 나이가 몇개니. 참아라 성훈아'


나름 가시일망정 뼈는 박힌 집안 자손이고 시골 대가족 속에서 자랐다.

어르신 공경할 줄도 알고 마뜩잖지만 어르신들이 힘겨워하면 태극기 다발도 옮겨줄 정도는 된다. 그건 이념과 사고의 차이일 뿐이다.

그런데 나이 먹고도 인간이 덜 된 물건은 어르신이 아니라 어르신 할애비라도 용납이 안된다. 남녀노소 불문이고, 지위고하 막론이다.


인간이 안된 말종은 인간 취급 하지 않고 상대하면 된다.

한두번 정중하게 대하다 이건 아니다 싶을 때, 발사 버튼이 눌러지면 순간적으로 돌변한다.

몇번 그런 경우를 지켜봤던 아내는 내 눈이 뒤집힌다는 표현을 썼었다. 살기까지 느껴져서 섬뜩하다고도 했다. 물론 주의 시키려고 과장했겠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버튼에 커버는 씌웠는데 뇌관은 아직 살아있다.


처음 트로트를 부르라고 했을 때, 그 정도면 됐다. 정히 노래가 마음에 안들고 요청을 들어주지않아서 자리를 뜨는 것도 괜찮다.

그런데 그가 보인 건 행패나 다름없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모독하고 가수를 능욕하는 행동인 것이다.  

그런 인간은 좀 맞아도 된다. 아니 맞아야 된다. 그래도 정신은 못차리겠지만 말이다.

모름지기 늙을 수록 정갈하고 체신을 지켜야 한다.

세상에 좀비는 없지만 나같은 또라이들은 곳곳에 있다. 언제 어디서 낭패를 볼지 모른다.


가수가 마지막 앵콜곡을 이렇게 소개했다. "이번에는 여러분도 잘 아실 곡으로....." 원래 준비한 곡이 아니었다면 왜 그러는지 알겠다.

남궁옥분의 '꿈을 먹는 젊은이'를 불렀다. 이 노래가 그렇게 슬픈 노래였는지 이전엔 몰랐다. 한껏 낭랑하고 발랄하게 부르는데 더 울컥해져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스마트폰으로 녹화하다가 끊었다.

'팼어야 했는데. 쌍욕 한바가지라도 퍼부었어야 했는데...'


하던 지랄은 안했지만 안하던 짓 한가지는 했다. 그 가수에게 다가가서 악수를 청했다.

"노래, 너무 좋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인디가수 <디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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