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성훈 Jul 14. 2022

유혹에 시달리는 글쓰기

단정적인 어투에는 자기 신념과 간절한 바램이 담겨있다. 주장이나 사실에 관한 확신이 필요하고 설득이나 공감을 원하는 것이다. 주장이나 사실에는 겸손의 미덕이 필요없고 설득과 공감에는 의지가 필수다.

 

반론이 예상되는 토론에서 단정적인 어투를 쓰지 않으면 확신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새로운 발견이나 이론을 펼칠 때에도 마찬가지다. 상대의 동의나 공감을 얻고자 하는데도 단정적인 어투만큼 주효한 것은 없다.

홈쇼핑에서 "단언컨대 이 제품을 능가하는 제품은 없습니다."라고 하지 "다른 제품도 좋을 수 있겠지만...." 사족을 붙이면 매진은 어렵다.

연인 사이라면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보다 "죽을만큼 당신을 사랑해"가 훨씬 강력하다. 제품을 팔거나 사랑을 얻고자하는 확고한 의지로 상대의 의심과 불안을 허물어뜨리는 것이다.


그런데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조차 미심쩍어하는 주장이나 밝혀지지않은 사실까지 단정적인 어투를 구사하는 경우가 있다.

거기에 불순한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면 범죄적이다. 형사와 민사를 가르는 사기죄도 '의도'에 방점이 찍혀있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사회적 혐오와 불신을 부추키고 맹신과 우민화를 획책하는 인물이나 집단이 있다. 많다.


단정적인 어투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있다.

틸버그대학의 앤서니 에반스(Anthony Evans) 교수 연구진이 2017년 4월 한 달간 뉴욕타임스에 게재된 8449개 기사에 대한 142만2478개의 댓글과 이 댓글에 응답한 51만개의 답글을 분석했다.

관심의 대상은 사용자들이 어떤 댓글에 더 감정적으로 대응하며 특히 화나 분노 혹은 혐오와 같은 발언을 더 많이 하는가다.  

분석 결과 자신감 혹은 확신에 찬 표현을 사용할 때 답글이 다분히 감정적이라는 것이다. 유보적이고 조심스러운 표현에는 감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답글도 적었다.


그런데 유의있게 지켜봐야 하는  현상은 '추천수'다.  

같은 내용이라도 감정적인 답글이 달리는 확신에 찬 단정적인 댓글일수록 전파속도도 빠르고 확산 범위도 넓은 것이다.

논란이 예상되거나 민감한 사안에 있어 단정적이고 확신에 찬 댓글일수록 분란과 파장을 일으키긴 하지만 동시에 추천도 많이 받는다는 것이다.  


한국 언론이 이런 현상을 가장 잘 악용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는다. 막강한 언론 권력을 휘두르면서 언론자유라는 방패 뒤로 숨는다.

그런데 서서히 기성언론을 대체하고 있는 대안언론이나 유튜브, SNS마저 이를 답습하고 있다.

일단 지르고 보자는 식이다. 출처도 미심쩍은데 필요이상으로 단정적이기까지 하다. 기성언론까지 민망한 가십거리를 줏으러 다니는 지경에 이르렀다.


언론도 채널을 일부 열어두고 있지만 유튜브나 SNS같은 뉴미디어의 강점인 즉각적인 반응이나 쌍방향 소통을 따라갈 수는 없다.

이 강점은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거나 신속할 수록 더 두드러진다. 심층적이거나 정확한 것은 각광받기 어렵다. 단정적이고 말초적인, 무례하기조차 한 언사를 구사하는 이유다.

상대방에게 재고나 판단할 여유를 주지 않으면서 쏘아부치고 언제라도 과거의 논조와 태도에서 돌변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같은 언론과 뉴미디어의 행태는 의도적이고 자본주의적이다.

기자들은 언론 사주의 의중을 살펴야 밥벌이를 이어가고 유튜버나 인플루언스는 유명세나 지명도를 올려야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실어나르는 기사나 주장을  접하는 나와 같은 시민들은 그들의 포섭 대상이자 뉴스와 정보의 소비자로서만 존재해야 하느냐는 문제를 생각해봐야 한다.


한동안 주춤했던 코로나의 확진자 수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누구나 알고 있듯 느슨해진 방역체계와 무뎌진 경각심의 영향이 크다.

나는 한국 언론과 뉴 미디어의 거짓되고 왜곡, 과장된 기사나 주장이 이런 바이러스와 같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교묘하게 감춰진 불순한 의도만큼이나 국민들은 자신의 감염여부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바이러스는 대개 두가지 특징을 가진다. 전파력과 치명률이다.

기사나 주장이 기승을 부리느냐 아니냐의 여부가 전파력이라면, 그로인한 사회적 분란과 선거 결과등이 치명률이다.


이같은 언론과 뉴미디어가 끼치는 악영향을 인식하고 그로 인한 사회적 손실과 국가적 난맥상을 우려한다면 시민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 첫걸음은 자신이 이같은 바이러스에 감염됐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뉴스거리의 재생산자 즉 바이러스의 숙주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주체성과 이념에만 경도되어 사실 여부나 자체 검증도 없이 공유하거나 이를 언급한다면 감염된 것이다.

공감이나 댓글 수에 연연해 기존의 기사나 주장에 더 강경하고 단정적인 어투를 구사하고 있다면 감염된 것이다.

신속성이 생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새로운 기사가 뜨면 중요도나 경중은 따지지 않고 먼저 입에 올리기를 다툰다면 감염된 것이다.

평정심을 유지하다가도 어떤 기사, 누군가의 주장에 욕설이나 환호하게 되는 충동과 감정적인 동요가 일어난다면 감염이 심각한 상태인 것이다.


두번째는 바이러스 창궐을 지연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SNS와 유튜브가 신뢰도 바닥을 치고 있는 언론을 빠르게 대체하고 있는 이유는 빠른 전파속도와 넓은 확산 범위때문이다. 전파속도는 접촉빈도와 정비례하고 확산범위는 활동력에 의존한다.

자신의 관심이 편중된 기사나 주장을 접하는 빈도를 줄이고, 주제나 소재로 다루는 걸 자제하는 것이다.

미디어의 악영향은 바이러스 전파와 같다. 우리 각자가 그들이 원하는 숙주가 되지 않아야 한다. 그들은 영악하고 음험하며 조직적인데다 전략적이다. 반론을 제기하는 것조차, 심지어 진실을 규명하려는 노력마저 그들의 전략 속에 들어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다지 중요도가 높지 않다면, 가십거리에 불과하다면 입에 올리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 자신의 반론을 펼치기위해 얼토당토않는 기사나 주장을 옮기는 건 역작용을 부르는 어리석은 짓이다.


세번째는 진실은 가리워지고 거짓과 기만, 술수가 난무하는 뉴미디어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의 바람직한 태도다.  

가장 중요한 덕목은 속도 경쟁에 몰입하기보다 심층적인 사유를 우선시해야 하는 것이다.

타인의 관심과 주목을 끌기보다 사유와 성찰을 통한 각자의 시선을 가지는 것이다.

깊고 다양한 시선이야말로 민주주의 강점이다. 자신만의 시선을 가진 시민들이 논의는 효율적이며 생산적이다. 그들의 세계는 깊고 넓어서 설득력과 포용력을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아집과 편견, 추종과 맹신은 조급증과 저열함의 부작용이다.

자신의 세계는 구축하지 않은 채 솔깃한 소문을 찾아다니고 현란한 말솜씨로 타인을 끌어들인다면 장돌뱅이 싸구려 약장사에 불과하다.   


매일 수많은 설과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기사거리가 넘쳐난다.

반복되고 재생산되는 변이종들은 실체 파악마저 불가능하게 만든다. 장사치, 사기꾼, 선동가, 모사꾼들이 진실과 거짓, 실체와 허위를 뒤섞어 놓는다.  

1인 미디어 시대, 언로가 무한 확장된 세계에서는 누구나 한마디 보태고 싶어서 안달이다.

한걸음 떨어져서 보고, 한번 더 생각하고 한숨을 돌린 다음이라도 결코 늦지 않다.


"아무리 하고 싶은 말이 있더라도 너무 앞서가지 마라. 따라오지 않으면 잠시 멈춰서서 들어라. 이해해줄 때 까지 설득하라. 그래서 의견을 맞추라"

평소 반 걸음만 앞서가는 글쓰기를 강조했던  故 김대중 전대통령의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글쓰며 배우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