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성훈 Jul 21. 2022

트레이싱지에 깔린 세상

볼펜보다는 만년필, 만년필보다는 연필이 좋다. 모니터 화면보다는 종이, 종이보다는 트레이싱지가 더 친근하다. 전형적인 아날로그 감성이다.


파지를 사랑한다. 쌓일 수록 뭔가 한 것 같아 혼자 으쓱해한다. 딜리트(Delete)키만 누르면 깔끔하게 삭제되는 화면보다 흔적에 흔적이 덧씌워지는 종이, 그러다 원래의 형체가 분간 안될 정도가 되면 다시 새로운 종이를 겹쳐 그린다.


내 책상 서랍에는 트레이싱지 롤 여러개가 얌전하게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트레이싱지는 바탕이 비치는 반투명한 종이다. 지난 30여년동안 써오고 있다. 프로젝트 하나를 맡으면 족히 한 롤 정도를 쓴다.

적당한 크기로 찢어서 덧대어 그리고 다시 그 위에 수정하길 거듭하는데 맨 아래 깔린 그림이 실루엣처럼 비치면 기분이 묘하게 좋다. 지나온 과정이 필름 윤곽처럼 눈에 들어오는 순간이다. 아침 첫 담배 한모금을 빨 때처럼 살짝 몽롱한 기분이 된다.


그렇게 책상 한 켠에 아무렇게나 구겨진 파지가 수북히 쌓이면 상상력과 아이디어로 뭉글물글 피어오른 구름을 보는 것 같다. 형태가 드러난 연필 그림 위에 펜으로 문신처럼 새기면 그 파지는 달콤한 솜사탕으로 변신한다.


컴퓨터에 익숙한 젊은 디자이너들은 굳이 스케일 감각을 익히지 않는다. 각종 소프트웨어가 이를 대신해주니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도 같다.

구식 디자이너인 나는 수기에 익숙하다. 암모니아 냄새 맡으며 청사진 굽는 알바를 했던 세대다. 1/100,  1/200 정도는 제 치수에 맞게 스케일이나 자를 대지않고 그린다.

지난 날, 열정과 불면의 밤이 내게 안겨 준 선물이다.


프로젝트의 중간 미팅은 채워지지 않은 빈 도면과 트레이싱 롤이면 충분하다.

내가 연필로 긋고있는 선을 쫒아가는 의뢰인의 시선을 느낀다. 그의 궁금증과 호기심이 내 손놀림으로 해소되면서 우리는 한 배를 탄 동류의식을 갖게 된다.

선이 면이 되고 면이 일어선다. 질문에는 즉석에서 세부 그림이나 입체, 투시도를 그려 대답한다. 나는 이런 과정을 무척 소중하게 생각하고 중요하다고 믿는다.

신뢰감을 가지게 되고 동질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아직도 하얀 종이 위에 깔끔하고 선명한 선으로 구획된 캐드(CAD)도면은 내 스케치가 근간인데도 선뜻 마음이 가질 않는다.

예전 사귀었던 애인이 나 몰래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다 커서 찾아 온 것처럼 낯설다.


내가 보는 세상은 흐릿하다.

컴퓨터가 그린 그림처럼 확실하지도 깔끔하지도 않다. 절대자의 솜씨인들 내게는 트레이싱지를 투과해 비치는 바탕그림에 불과하다.

그 세상 그림 위에 수정하고 또 다시 그리고 덧그린다. 세월만큼 겹겹히 덧대져서 바탕 그림의 흔적마저 찾을 수 없어도 상관없다.

나를 거쳐간 수많은 인연과 이야기가 파지로 탑을 쌓고, 알게 모르게 저질렀던 실수 위에 다시 새로운 선을 그릴 수 있으니까.

간과하고 지나쳤던 사실을 다시 덧그리고 새롭게 드러난 진실을 그을 수 있으니 다행이다.


내가 그려가는 세상은 트레이싱지 위에 형체가 드러나는 연필심의 궤적이다.

작가의 이전글 시끄럽다라는 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