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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Aug 02. 2022

와인을 몰라도 돼

약속시간 20분 전에 도착했다. 아직 선배는 오지 않았다. 그동안의 만남에서 처음으로 내가 먼저 도착했다.


종업원이 안내해준 예약석 팻말이 올려진 테이블은 에어컨 바로 아래였다. 에어컨 바람은 피하고 싶었다.

"혹시 다른 자리로 옮겨도 될까요?"

"네. 빈 좌석으로 옮기셔도 돼요."

에어컨과는 좀 떨어진 4인석 테이블로 정했다. 측면 긴 붙박이 의자에 소지품을 올려놓기도 좋았다.


선배가 도착했다. 한 손에는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어이쿠 이거 왜 이리 무거워. 가방에 뭐가 들었길래...." 쇼핑백을 놓느라 내 가방을 옮기던 선배가 물었다.

"그냥.... 노트북이랑 책 몇 권... 뭐 그렇게 넣고 다녀요."

선배가 웃으며  물었다.

"너 아직도 책 읽냐?"

"원래 공부 못하는 애들이 책가방은 무겁잖아요. 안읽히는데 그냥 습관처럼 넣고 다니는 거죠 뭐 허전해서...."

"책 읽지 마라. 그거 읽어서 뭐하려고....."

선배는 내가 만난 다독가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책 읽지 마라'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고보면 선배는 늘 그랬다. 미괄식이 아닌 두괄식이었고 선승처럼 화두부터 던진다.

언젠가는 "전쟁이 터져야 돼. 그렇지 않으면 바뀌지 않아" 라며 폭탄을 던진 적도 있다. 물론 사전적 의미의 '전쟁'은 아니었다. 덕분에 세계 역사와 정치, 사회 개혁에 관한 흥미로운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래. 요즘은 뭐 읽고 있는데? "

"별거 아녜요. 의무적으로 '안나카레니나' 읽는 중이고 나머지는 철학이나 에세이죠 뭐"

"재미있냐? 너는 뭐하러 책을 읽는데?"

"그냥.... 내가 무식한 걸 알아서 그렇죠. 근데 읽을 수록 모르는 게 많아져서 별로긴 해요."

"제대로 알긴 아네. 너 안나 카레니나 읽는다고 했지. 그럼 하나 묻자. 너하고 톨스토이 중에 누가 더 똑똑할 것 같냐?"

"네? 그게 무슨........."

"이런 얘기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쯤 되니까 파스칼이나 니체만큼 아니 오히려 그들보다는 좀더 아는 것 같애. 당연하지 그들과 나 사이에는 시간의 간극, 지식과 정보의 양이 다르니까. 너 역시 수백년전 당시의 갈릴레오나 뉴턴보다 많이 알면 알지 모르진 않아.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그들을 읽고 있잖아. 왜인것 같아? 왜 그래야하지? 그게 의미가 있을까? 중요한 건 말야......."


한창 대화가 무르익는데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부탁한 와인잔과 함께였다. 선배의 쇼핑백 안에는 아직 차가운 와인 한병이 들어있었다.

"자 이거 한번 맛봐라."

과일향이 상큼한 화이트 와인이었다.

"맛있네요. 이거 완전 내 입맛인데..... 제가 와인은 모르지만 이건 이름 알아가야겠다."

"모르는게 어딨냐. 니가 맛있으면 된거지. 싸고 맛있는 좋은 와인이다. 바비치 블랙."

"형님 집에 와인 많잖습니까. 와인도 잘 알고 커피도 전문가고.... 나도 그런 거 공부 좀 할까?"

"무슨 공부는 공부...... 나야 그냥 이것저것 먹다보니 좋아하고 알게 된 거지 (해외출장이 잦았던 선배는 80년대부터 와인을 접했다.). 내가 아는 사람중에 소믈리에, 이름난 전문가 꽤 되는데 엉터리가 더 많아.... 이런 건 그저 기호이고 취향인 거지."


정의를 내리거나 결론을 내야만 하는 문제는 아니라서 숙제로 안고 돌아왔다.

"아직도 책 읽냐?"는 말은 "제대로 읽지 않으면 소용없다."거나 "언제까지 읽기만 할래?"라는 말이기도 했다.

책에는 길도 없지만 답도 없다. 질문만 던져놓고 개문발차한다. 쫓아서 올라탔는데 목적지가 다를 수도 있다. 플랫폼에서 마냥 기다린다고해서 나아질 것 같지도 않다.


우리는 자신이 낸 문제마저 풀지 못하고 죽는다. 다만 문제는 알았으면 좋겠고 반드시 답을 구하겠다는 강박은 떨쳐버려도 될 것 같았다.


와인은 배우는 게 아니라 즐기는 것이고 자신에게 맞는 와인이 최고의 와인이라고 했다. 남의 평가와 기준, 원산지와 가격이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한다.

나를 가장 귀하게 여기는 삶, 내 입맛에 맞는 와인......


우리 눈은 밖으로만 향해있어 정작 자신을 볼 수 없다. 그래서 항상 바깥에서 답을 구하려 헤매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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