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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Aug 05. 2022

그릇을 굽지는 못하지만...

그릇을 굽지는 못하지만

새벽 모임을 마치고 재첩국을 데웠다. 마지막 분량이다. 하동에서 올라온 냉동 포장 제품이다.

6월 초. 새벽녘에 불듯 생각나서 하동행 기차편을 검색했었다. 기차편이 매진이라 김포의 식당을 찾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아쉬움이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길래 온라인 주문을 했다. 서울에서 광고일을 하다 지리산 자락으로 귀농한 농부가 운영하는 인터넷 판매사이트였다. 주로 유기농 작물과 제철 나물을 소개하는데 '하동 섬진강 재첩국'이 올라와 있었다.

"...오직 재첩진국, 알갱이, 식염만으로 맛을 냅니다."라는 소개 문구에 꽂혀 주문했었다. 재첩과 물 그리고 소금만 써야한다.

제대로 담그는 오이지가 그렇다. 오로지 물과 소금만으로 맛을 내야 한다. 맑은 콩나물 국을 끊일 때도 그러하다.


원재료와 소금 이외의 첨가물이 들어가서는 안되는 음식들이 있다. 그래서 쉬울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재첩국도 자못 까탈스럽고 신경을 많이 써야한다. 재료가 좋아야 하고 꼼꼼히 손질해서 불 조절을 잘해야한다. 재첩은 직경이 2cm도 안되는 작은 조개인데 모래 알갱이를 잘 걸러야 한다. 어선이 쇠갈퀴로 긁어 대량 채취는 것보다는 일일이 사람 손으로 채취하는 전통방식이 모래가 없다.


국물을 우려내는 음식이 다 그러하듯 냄비가 아닌 큰 솥에 많은 양으로, 센 불이 아닌 중불로 은근히 끓여내야 한다.

소금은 간수를 뺀 2년이상 묵은 천일염으로 간을 해야 한다. 나는 굵은 소금을 덖어 곱게 갈아 쓰는데 이제 얼마남지 않아 서양의 트러플처럼 귀한 음식을 간할 때만 쓴다. 마트에서 파는 맛소금을 썼다간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는 격이다.

주문한 재첩국은 이미 간이 된 것인데 몇 년 묵힌 소금인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한번에 많은 양을 끓인 것이라 국물은 뽀얗게 잘 우러났다.

알갱이가 자잘한 것이 요즘 많이 난다는 새만금산이나 중국산이 아니었다. 김포의 식당에서 맛본 재첩국은 씨알이 굵은 새만금 산이었다. 은근슬쩍 돌려서 찔러봤는데 주인장은 희미한 웃음으로 인정했었다.


한동안 냉동실에 넣어두고 외할머니가 다락에서 꺼내주시던 곶감처럼 꺼내 먹었다.

달리 내가 할 것은 없다. 한소끔 끓을 때 얼른 그릇에 담아 미리 썰어놓은 정구지(부추)을 올리는 것이 고작이다. 이파리가 넓은 양부추를 써서는 안된다. 알싸한 맛이 살짝 감도는 조선부추여야만 한다.

정구지는 국물과 같이 삶겨서는 안되고 뜨거운 훈김에 살짝 익혀야 한다. 삶겨버리면 아삭한 식감은 날아가고 질겨진다.


재첩국에 고명처럼 올려진 정구지를 보면 괜시리 기분이 좋다.

정구지는 생명력이 강해 잡초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농약을 뿌릴 필요도, 밭을 메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밭을 가리지 않는데 베어내도 계속 자라서 연중 수확할 수 있다. 나는 정구지의 개량되지 않은 야생성이 사랑스럽고 정구지가 바로 잡초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새벽에 케잌 한 조각과 커피로 잠을 깨운 터라 그다지 시장하지 않았지만 근기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냉장고에 두부 한 모가 있어 함께 끓였다. 국물을 너무 흐리게도 안할 뿐더러 제 목소리가 강하지도 않아서 시도해봤는데 나쁘지 않다. 아무런 반찬을 꺼내지도 않고 밥없이 재첩국 한그릇으로 시작해서인지 아침이 가뿐하다.


재첩국 한그릇에도 가라앉은 알갱이만큼이나 많은 이야기가 뽀얗게 우러나온다.

지난 밤 아버지의 취중 울분과 탄식, 재칫국  아지매의 바지런한 외침이 새벽을 깨트리던 어린 날이 있다.

좋은 흙을 찾아 전국을 뒤지고, 인적드문 에 가마를 짓는다. 잘 고른 장작으로 조심스레 불을 다뤄 그릇을 굽는 도공의 삶을 음미한다. #참꽃이_피면_바지락을_먹고(신경균/b.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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