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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Aug 24. 2022

작업을 하다가 문득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을테지만 나는 아직 오른쪽과 왼쪽이 헷갈린다. 꼭 숟가락 드는 손을 꼬무작거려 확인할 때가 많다. 당연히 오래전 교련시간과 군대에서 '우향우' '좌향좌' 구령에 곤혹을 치렀다. 내가 길치인 것과도 상관있을 것만 같다.

오랫동안 '소조'와 '조소'를 구분하지 못했다.

소조는 뼈대에 점토같은 조형재료를 덧붙여서 형태를 만드는 조각의 한 기법이고 조소는 조각과 소조를 아우르는 말이다.

이렇게 알고는 있지만 막상 누가 물어보면 또 헷갈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오른쪽'과 '왼쪽'처럼 말이다.


시간은 지난 과거를 쌓는 것일까 현재를 다듬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남은 미래를 깎아내는 것일까. 아마 모두를 아우르는 단어일텐데 누군가에겐 과거가 중요하거나 현재나 미래에 더 무게를 두고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다루는 공간은 채우는 것인가 비워내는 작업일까 아니면 둘 다 일까? 나는 공간을 빚는다거나 다듬는다는 표현을 좋아한다.

말하자면 소조보다는 조소에 가깝다. 재료를 주물럭거려서 형태를 만들기도 하지만 깍아내고 없애기도 하는 것이다. 뼈대는 건축이 제공한다. 소조와 차이점이라면 뼈대가 안이 아니라 거죽에 있는 것이다. 이미 만들어진 형틀안에서 꼬무작거리는 작업인 셈이다.


인테리어나 디자인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고 범위 또한 다를 수 있겠지만 나는 인테리어가 도공의 작업 과정과 흡사하다고 생각한다. 재료를 찾아나서고 선별해서 그릇을 굽는 것처럼 재료의 물성을 잘 알아야하는데다 형태를 만들어 절제되고 어울리는 아름다운 문양을 새긴다. 그리고는 온전히 가마와 같은 타자의 힘을 빌리는 수 밖에는 없는데 그마저도 내쳐 둘 수 없어 눈이 충열되도록 지켜봐야 한다. 그렇다고 한들 만족스런 결과물을 얻는가 하면 그런 보장은 주어지지 않는다. 가마의 불이 꺼지고 구워진 그릇을 손에 쥘 때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다. 미세한 균열과 형태의 일그러짐 심지어 측정하기 힘든 유약의 두께차이로 살아남기도 하고 깨어져 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인테리어가 그렇다. 세상에 나와있는 그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내 머릿 속 구상을 의뢰인에게 명확하게 전달할 수는 없다.

나는 멀리 보이지만 또렷한 별빛을 쫒을 뿐이고 의뢰인은 어슴프레 그려지는 내 구상과 디자인 감각, 오랜 숙련의 과정을 신뢰할 수 밖에 없다.

함께 떠나는 미지로의 여행에서 나는 전적으로 나를 믿지 않으면 안된다. 그 신뢰는 지난한 숙고와 불면의 시간에서 기인한다.


머릿속 구상을 감각으로 빚고 기술자의 손을 빌려 만드는 과정은 도공이 흙을 빚어 가마에서 그릇을 굽는 그것과 흡사하다. 결과물의 완성도는 마침내 드러나기 전기까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공간이나 그릇이나 무엇을 담을 때 진정한 가치를 지닌다. 그저 보여주거나 바라만 볼 뿐인 공간이나 그릇은 매력이 떨어진다. 사람이 머물든 차를 담든 제 소용을 다하고 있을 때라야 빛이 나고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조그만 찻잔이든 커다란 달항아리든 도공은 영혼을 덜어내어 빚는다. 투박해진 손으로 빚는 찻잔이 더 어렵기도 하고 간혹 일부러 찌끄러뜨린 찻잔의 아름다움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도공은 가마에서 꺼낸 그릇을 보는 순간 안다.. 그리고는 흡족한 미소를 짓거나 묵묵히 깨뜨려 버리는 것이다.


공간을 빚는 작업이 그러하다. 크든 작든 모든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때로는 두드러지지 않는 작은 디테일에 많은 공을 들이기도 한다. 마침내 전체 구도가 드러날 때가 되어서야 결과물을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 도공은 매순간 아궁이에 눈을 떼지않고 불조절을 하더라도 가마속 그릇을 들여다 볼 수 없지만 인테리어 디자이너는 작업 과정 전체를 지켜보며 재작업을 시키거나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손님을 맞는 것과 의뢰를 받아서 하는 작업의 차이일 수도 있다.


내게 있어 주변이 어지럽고 잡 생각이 많아질 때 일을 맡게되면 피신처가 마련되는 것 같고 행복해진다. 몰입할 거리가 생겨 세상사를 떨쳐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간의 일부를 허물어내고 구조물을 세우고 디테일을 다듬는다.

내 손에 쥐어질 그릇에 담길 차는 분명 맛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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