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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Sep 04. 2022

나의 한계

창의라 부르든 창작이라고 하건 인간이 창조할 수는 없다. 발견이 맞는 말이지 진정한 의미의 발명이 있을 수 있을까?

만드는 작업을 하는 나의 오랜 지론이다. 공간을 나누거나 채워서 소용있게 하고 아름다움을 찾는 작업. 그런데 무슨 조화를 부리고 어떤 재주를 피워도 자연을 능가할 수는 없다.

자연 그대로이거나 자연이 깎고 피워낸 균형과 조화, 탁월한 심미적 감각은 언제나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


해도 그만이고 안해도 뭐라고 하지 않텐데 이틀동안 골몰했다.

화훼시장에서 화초를 사고, 쟁겨뒀던 유목과 조화를 가져와 데코레이션을 했다.

실은 내 욕심이다. 누가 그르칠까 조바심이 나서다. 어떤 각도에서 찍어도 그림이 되는 공간, 어느 자리에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게 목표이자 꿈이다.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자연에 도움을 청하는 이유다.


자연의 조각품은 공간의 격을 끌어올린다. 그 어떤 인간의 창작물도 견줄 수 없다.

아무리 솜씨를 발휘해 흉내를 낸 들 오묘하게 비틀리고 가늘어지는 나뭇가지를, 가장 적절한 위치에 가장 알맞은 크기의 잎사귀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살아있는 것은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햇빛을 쫓고 바람을 따라 그림을 그린다.


죽어서도 살아있는 신비로움은 찬탄을 자아낸다.

강원도, 군 시절 주목을 캐러 다닌 적이 있다. 그 때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미국 어느 주의 울창한 산림 속에 죽어있던 나뭇가지가 한국에서 유목으로 다시 태어난다.  


나는 CAD로 그린 선에 심드렁하다.  사람의 손으로 그은 선은 꿈틀거리는데 누워있는 시체를 보는 것 같아서다.

사람들은  컴퓨터가 마법처럼 창출한 3D 그림에 환호하지만 나는 속으로 콧웃음을 친다. 마법이 아니라 사기일 때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 환상적인 조도, 절묘한 배치, 화려한 색감은 실제 만들어 낼 수 없다.

제시하는 사람도, 평가하는 사람도 알면서 속아주거나 착각을 양해할 용의가 있을 뿐이다.


나는 삐뚤고 몇번씩이나 덧그리더라도 손스케치를 먼저 한다. 3D Max 작업은 잘 시키지 않는데 제시해야 되는 상황이면 실제와는 다를 것이라고 주지시킨다.

그보다는 자세히 묘사해주고 비슷한 이미지 컷을 보여줘서 스스로 연상할 수 있게 한다.

형태 묘사보다는 느낌이나 테마를 들려주는데 훨씬 주효한 경우가 많다.

이럴 때 일천한 독서 편력이지만 큰 도움이 된다. 책 속의 한 줄 문장, 소설 속 배경이나 장면이 3D 시뮬레이션보다 더 주효하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인간이 대단한 존재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인간이 존재하지 하는 공간은 내 작업 무대가 아니다. 인간이 자리를 잡고 공간을 채울 때 비로소 공간이 살아 숨쉬기 시작하고 그 존재 가치를 가진다는 말이다.

마침내 이 공간에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이야기가 만들어지면 비로소 공간은 장소가 될 것이다.


공간을 채우기는 쉽지만 장소를 되기란 어렵다. 누군가의 유의미하고 기억되는 장소가 될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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