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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Sep 12. 2022

사진을 잘 찍으려면

인생 첫경험이자 가장 뼈저린 기억으로 남은 그 사건이 있은지 십여년이 흘렀다. 지인의 사무실 한 켠을 빌려쓰다 처음으로 내 사무실을 얻어 독립하려던 참이었다.

돌이켜보면 모든 조건이 파격적이었다. 강남의 요지, 넓은 공간에 임대료 역시 무척 쌌다. 덜컥 계약부터 하고 잔금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은 그가 첫 만남의 자리에 데려 온 어린 딸이 결정적이었다.

'설마 어린 딸을 앞세워 사기야 치겠어?' 나름 업무처리에 빈틈없고 돌다리도 두들기고 건넌다는 자부심이 한 순간에 무너졌다.

이삿짐 트럭을 대로변에 세워둔 채 짐 부릴 공간이 허공으로 사라져버린 그 막막함이란. '길거리에 나앉는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뼈저린 후회는 패인 상흔만큼이나 깊은 교훈을 남긴다.

찬찬히 짚어보면 상대는 계획적이고 주도면밀했다. 부도시점에 맞춰 임차인을 골랐고 보증금 입금은 일요일로 정했으며 계약일에는 딸아이를 대동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나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건물 관리인과 연락이 안되는 주말에 절차를 밟는 것은 피했어야 했고, 혹시나 좋은 기회를 놓칠까하는 불안감은 진정시켰어야 했다. 모든 상황을 냉철하게 관망하고 세심하게 챙기질 못했다.

더욱이 '애비라면 설마 자식 앞에서 사기를....'따위의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과 통념을 객관적 판단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됐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살아갈수록 실감한다.

'있는'은 객관적 사실이거나 검증된 결과일 수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진실'은 아닐 가능성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그대로'는 주관성이나 감상이 배제됐다는 의미일테지만 그조차 심리적 동조나 정서적 공감에 영향을 받으니 확신하기 어렵다.

'본다'는 시력이나 시야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이성의 영역으로 이해하고 판단한다는 뜻일텐데 지적 수준과 주관적 경험에 좌우된다. 즉 각자의 시선의 높이와 깊이로 보게 되는 것이다.


찰라까지 포착해서 저장하는 카메라에는 두 개의 렌즈가 있다.

피사체를 향하는 대물렌즈와 피사체가 보이는 대안렌즈다.

대물렌즈는 카메라가 바라보는 외부세계를,  대안렌즈는 자신의 내면 세계 즉 드러내고 보여주고 싶은 심상을 향해 있다.  

이 두 세계가 만나는 지점에 촛점을 맞춰 셔터를 누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 장의 사진을 통해서 작가의 정서나 주장과 같은 내면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다.


카메라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안구를 본떠서 만들었다.

피사체가 통과하는 렌즈는 각막이고 상이 맺히는 필림은 망막이다. 그런데 안구에 구조적인 대안렌즈는 없다. 내면을 들여다보는 렌즈가 없는 것이다.

없다고는 하지만 실은 정신세계에 존재한다. 그 보이지 않는 렌즈가 바로 자신의 이성과 감성, 지적 수준과 정서적 경험을 향하고 가치관, 이념, 철학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각막으로 들어오는 외부세계와 내면을  들여다보는 정신세계가 일치하는 순간 우리는 판단과 선택이라는 셔터를 누른다.


시야에 들어오는 피사체나 현상은 같을 지라도 인간 내면에 자리잡은 망막에 맺히는 상은 각기 다르다.

거꾸로 맺히기도 하고 왜곡되거나 흐릿하기도 하다. 정신세계라는 렌즈를 한번 더 통과하기 때문이다.

무한 확대가 될 만큼 선명하고 또렷한 상은 자신의 내면이 얼마나 맑고 정밀한 지가 결정한다. 결국 있는 그대로 보려면 상을 흐리게 혹은 왜곡시키는 질투, 시샘, 편견, 선입관, 이기심 따위의 먼지를 걷어내야 한다. 정서와 지적 수준을 높이고 이성적 합리적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깊은 사유를 통한 통찰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과거 내가 임대 사기를 당한 것은 제대로 보지 못했고 내면이 영글지 않았기 때문이다. 촛점을 둬야 할 곳에 두지 않았고 선입견이 판단을 흐리게 한 결과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자조와 비탄의 소리가 들린다.

공동체의 판단과 선택에 따른 결과다. 우리 각자의 시선 높이와 깊이가, 그 총합이 아직 낮고 얕았던 탓이다. 내면이 성숙되지 못해 보여지는 것조차 왜곡시켰던 것이다. 자조와 비탄의 그림자는 길고 짙어서 희망이 비추지 못하고 의욕의 싹이 틔지 못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암실에 들어섰다고 생각한다. 이미 인화지에 드러날 모습을 짐작하면서도 컴컴한 곳에서 지독한 약품 냄새를 맡아야 하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일찌감치 암실의 장막을 걷어내자는 주장을 한다. 굳이 인화되길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암실에 빛이 들어가면 필림을 버린다. 새로운 필림으로 다시 찍자는 것이다. 그런데 서둘러 새 필림으로 간다고해서 실패가 반복되지 않으리란 보장을 할 수 없다.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렌즈부터 닦아야하고 카메라를 바꿔야 한다.


어쩌면 바깥이 보이지 않는 암실에서 각자의 내면을 더 깊숙히 들여다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는 것이 바람직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제대로 보고,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점에 암실을 빠져나와야 한다.

제대로 된 사진을 찍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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