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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Sep 15. 2022

라스베이거스에서는...

안색을 살피더니 피곤해 보인다고 했다. 나는 생각하는 중이라고 했다. 이내 계절앓이를 하는 알러지 비염약이 독한 것 같다고 덧붙인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골똘히 생각에 잠겼지만 정작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잊었다. 멍한 건 사실이지만 꼭 약이 독해서는 아닌 것 같다.  


흐린 날 먼 산처럼 남은 삶은 뿌옇기만 한데 내 주위를 맴도는 소소한 사건들은 발등에 떨어지는 빗방울마냥 선명하다.

스며든 빗물에 질척거리는 신발을 끌며 걷고 있는 기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계적 이슈에는 둔감하고 가십거리에는 예민하다. 인류적 대참사는 쉽게 망각하면서 사인간의 다툼은 오래 기억한다.  

물론 낙숫물이 댓돌을 뚫고 바닷가 몽돌은 큰 파도에 닳은 것이 아니다. 사람을 깎아내고 닳게 하는 건 사소하고 변변찮은 근심과 걱정이지 삶을 집어삼킬듯 달려드는 고난과 질병이 아니다.

우리가 감내할 수 없는 것들은 기어코 끝장을 보게 만드니까. 쓰나미처럼.


언뜻 우리말 같기도 한 힌남노가 비껴간 한반도의 하늘은 파아란 가을 옷으로 갈아입었다.

연일 재클린을 따라하는 물색없는 한 여성의 패션이 SNS를 달군다. 에미상을 받은 연인과 다정한 포즈를 취한 또다른 여성의 의상은 영국 배우가 입었던 것이라고 한다.


그게 무슨 대수인가.

정작 주목할 건 복사기에 얼굴을 들이댄 합성사진이 공공연히 떠돌만큼 거짓과 표절, 모방으로 점철된 그녀의 삶이다. 그것도 내 나라의 대통령 부인이라는 사실이다.

누가 입었던 옷이면 어떤가.

세상사람 모두가 아는 재벌의 전처이면서 13년차 연인의 공식석상에 모습을 보인 그녀의 용기있는 사랑에 눈을 반짝이고, 밀물처럼 적셔오는 세태의 변화를 읽는 게 더 중요하다.


예술 무지렁이인 나를 가장 오랜 시간 붙들었던 작품은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이다.

수천억의 가격보다 더 기함하게 한 건 아무런 방어막없이 홀로 서있다는 사실이었다. 전시기획자의 남다른 수완에 찬사를 보냈었다. 그 전시기획자가 김건희였고  그녀의 허위 경력에 쓰인 삼성의 회장 전처가 김세령이다.

그렇게 내 삶과는 동떨어진 세계의 두 사람은 여고괴담의 주인공처럼 선뜻 내 눈 앞으로 다가선다.


언제부턴가 현금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많은 카드 역시 스마트폰 앱 속으로 사라졌고 단 하나의 카드만 남았다.

'하나 카드'다. 유일하게 현금인출 기능이 있는데 오랫동안 외환은행과 거래를 했기 때문이다. 외환은행이 하나은행으로 합병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하나은행 고객이 됐다.

외환은행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는데 그 망령은 20년째 한반도를 떠돈다. 2002년 외환은행을 헐값에 인수한 론스타의 망령이다.

한국 정부가 론스타에 3000억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났다. 법무부 장관은 승복하지 않고 끝까지 론스타와 다투겠다며 기세등등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고 꺼림칙하다.  

이 '라스베이거스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에 연루된 인사들이 모두 현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국무총리 한덕수, 경제부총리 추경호 게다가 이 사건을 수사했던 윤석열은 대통령이 됐고 그 수사팀에 한동훈 자신이 있었지 않은가.


스마트폰 알람이 울린다. 대출금리가 올랐다는 반갑지 않은 문자다.  

속셈을 해보지만 이달 대출이자는 또 얼마나 더 내야하는지 감이 오지 않는다. 어느날 문득 그 돈은 움켜쥔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것이다.

으레 문자 서두에 찍힌 '항상 저희 은행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란 문구가 얄궂다. 무엇이 그토록 감사할까. 꼬박꼬박 안밀리고 이자를 내줘서일까. 아니면 오른 금리에도 아무런 저항을 못해서 감사한 걸까.

은행은 손해보지 않는다. 국부를 유출한 관계자 역시 처벌받지 않는다.

대기업은 그들의 손실을 국민의 혈세로 막아주는 정부에게 감사하겠지만 나같은 소시민은 금리가 오르는 족족 가차없이 차액을 전가하는 은행에게 감사 인사를 받고 싶지 않다.


내가 낸 세금은, 오른 이자는 누구의 손에서, 어디로 빠져나가고 있는 걸까? 나는 왜 아무에게도 항의할 수 없고 책임을 물을 수 없단 말인가.

나는 어디를 향해 삿대질을 해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조용하다.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다. 그런데 나는 이 침묵이 두렵기만 하다.

1400원을 육박하는 달러환율에도, 포항제철소를 잠기게 한 물난리에도, 25년만에 닥친 무역수지 연속적자에도 평온한 이 비정상적인 상황이 기이하다.  

먼 바다에서 일렁이는 너울을 보는 착각에 빠진다. 내 발앞으로 밀려드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것 같다.


언제나 그랬듯이 세상에는 환율급등이 해외여행 호기라며 내심 반색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금값이 된 시금치 값에 한숨 짓는 사람들도 있다. 누구나 나이테만큼의 사고의 둥치는 커지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은 누군가의 발목을 적시는 잔잔한 바다지만 어느 순간 빌딩 높이의 해일이 눈앞을 가리면 아무도 가리지않고 삼킨다는 사실만은 변함없다.


벨소리가 까무룩 잠드려는 나를 깨운다.

막내 동생이다. 바람 새는 소리로 수술 잘 받았다는 소식을 전한다.

일주일 가까이 방바닥을 구르다가 병원을 찾았더니 맹장염이었단다. 그동안 어머니는 걱정에 노파심이 더해져 근거없는 불안감을 전파하시곤 했다.

"터지진 않았다고 하지? 어째 그리 미련하냐... 별거 아냐. 나는 터져서 복막염이될 때까지 몰랐는데 뭘...."

몇년 전, 나 역시 감기몸살인줄로만 알고 며칠을 버티다가 터지고 나서야 긴급 수술을 받았다. 그 덕에 동생처럼 오랜 시간 대기하다 오밤중에 수술받는 일은 없었다.무작스러움도 유전이 되나보다.


동생은 코로나로 인해 혼자서 수속과 수술 입원까지 마쳤다. 일상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던 작은 돌 하나는 물 속으로 잠겼다.

그래도 여전히 먼 산 구름은 여전하고 나는 질척거리는 신발을 끌고 뿌연 잠 속으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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