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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Sep 21. 2022

매일 매일 회사가는 버스안에서

최근 개비한 신형 자가용 덕분에 출퇴근길이 가뿐하다.

트렌드에 걸맞게 전기차이고 노약자도 쉽게 타고 내릴 수 있는 저상형 버스다. 게다가 비교적 한가한 시간대에 이용하는데다 황금노선은 커녕 적자가 아니면 다행이다 싶은 노선이고보니 늘 앉아서 간다.

기분이 그러하니 절로 운전기사분께 콧노래하듯 인사를 건네게 된다.


오늘 아침엔 '왜 난 이 버스를 타면 기분이 좋을까?' 곰곰히 생각해봤다.


첫번째.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

나만의 지정석이 있는데 운전석 바로 뒷자리거나 그 맞은편 자리다. 둘 다 계단이 밟고 올라가는 높은 좌석인데 단독석이다.

계단이 있다는 건 그만큼 불편해서 남이 잘 선택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뒤에는 좌석이 없어 뒷사람을 신경쓰지 않고 목받이에 기댈 수 있다.

좌석 뒤 가방 놓을 여유공간은 덤이다. 이럴 때 테이블 위에 스마트폰을 두고도 화장실을 갈 수 있는 한국에 사는 자부심을 느낀다.


두번째. 삶의 여유가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

승용차라면 20분도 채 안걸릴 거리인데 4~50분이 걸린다. 무려 24개 정거장을 거치는 것이다.

직선거리로는 10km인데 구비구비 돌아서 간다. 번잡한 구시가지를 빠져나와  한적한 녹음에 젖다보면 신도시가 펼쳐지는 식이다.  

흡사 안동 하회마을을 휘감아 도는 낙동강 줄기 같은 노선이다. 하회(河回)가 본디 '물이 돌아나간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저절로 도심의 풍류객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세번째. 연애하는 기분으로 한결 젊어진다.

배차 간격이 20~30분인데 실은 들쑥날쑥이다. 정거장까지 직선거리로 1km남짓 걷는데 시간 여유가 있을 때는 일부러 둘러가기도 한다.

그런데 도착시간조차 앱과 조금씩 틀릴 때가 많아서 그 1~2분 상간으로 눈 앞에서 놓치거나 쾌재를 부르며 타게 된다.

변덕 심하고 잘 토라지는 젊은 애인이 그러할 지다. 실컷 10여분을 걸어가 건널목 앞에서 쌩하고 내빼는 버스를 멀뚱히 보고 있노라면 화가 나기보다 허탈하게 웃게 된다.

채 몇 분도 기다리지 않을 도도한 애인과의 데이트 약속시간을 지키듯, 첫 소개팅에 늦지않으려는 매너로 바삐 걷게되니 심장과 다리가 절로 젊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무시하지 못할 즐거움이 하나 더 있다. 친환경 전기차라서 유독가스를 배출하지 않으니 차창 밖 사람들에게 미안해하지 않았도 되고 저상버스라서 혹시 모를 휠체어 탄 장애우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분, 어린아이들에게 신경을 덜 써도 되는 안도감을 준다는 점이다.


그렇게 버스는 내게 맘편한 휴식과 한가로움을 준다. 부자의 여유보다 빈자의 한가로움이 얼마나 가치있는지 일깨워 주는 것이다.


한때 나는 회사를 욕심껏 키운다면 운전기사부터 고용하겠다고 공언했었다. 차는 좋아했지만 그만큼 운전하기를 싫어했다.

만약 그 바램대로 마이바흐(Maybach)의 푹신한 뒷좌석에 기대어 게슴츠레한 눈으로 차창 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면 행복했을까?

아마 그리 됐다면 내 무릎엔 노트북이, 옆 자리엔 서류뭉치가 놓여있었을 것이다. 어마무지한 배기량의 기름값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운전기사의 급여를 감당하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미 나는 매일같이 두근대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정거장으로 걸어가고 있지 않은가.  


결국 행복은 바삐 쫓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느끼는 것이고, 삶의 여유를 즐기는 태도는 자부심에서 비롯되는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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