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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Sep 21. 2022

당신은 침대에서 뭘 입고 있나요

버스를 기다리는데 물씬한 꽃향기가 뒷덜미를 낚아챈다. 힐끗 돌아보니 묘령의 여인이 뒷태만 남기고 총총히 멀어져 간다.

이제 인간 수컷의 후각은 자극적인 인공향에만 반응할 정도로 퇴화된 것인지도 모른다.


동물은 수컷이 사방에 그들만이 맡을 수 있는 냄새를 묻혀 영역표시를 한다. 암컷은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자신과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안으로 숨어드는 것이다. 생존적 본능으로 냄새를 남기기도 지우기도 하는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라며 스스로 존대하는 인간만이 온갖 만들어진 향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상 지우려들고 과감히 드러내는 것이다.

지워진 태초의 본능을 노루의 배꼽에서 혹은 꽃과 나무에서 뽑은 향으로 일깨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침대에서 뭘 입고 주무시나요? (What do you wear to bed?)”

“샤넬 넘버5 (Chanel No5)!”


그 어떤 광고 카피보다 성공적인 마켓팅으로 이어진 이 인터뷰의 주인공은 마릴린 먼로(1926. 6. 1- 62. 8. 4)다. 향수에 문외한인 나조차 샤넬 No.5는 알고있으니 말 다한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무한확장되는 야릇한 상상력에 그만 묻혀버린 것이 있다. 백치미의 섹스심벌로만 각인된 그녀의 재치와 은유다.


방향제와 향수 향조차 구분하지 못할 게 뻔한 내가 샤넬 No.5와 마릴린 먼로를 떠올린 건 비교적 최근 기사에서 읽은 한 구절 때문이다.


"엄마는 언제나 행사, 모임, 공항, 회사로 가고 있었다. 멋진 실크나 모직의 완벽한 정장 차림에 샤넬 5번 향수 냄새를 희미하게 남기면서. 아빠는 그걸 ‘세상을 이기려고 무장한 엄마의 아름다운 갑옷’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2022. 8. 27>”


이 아름다운 갑옷을 걸친 전사는 불과 이 인터뷰를 한지 한달도 안돼 세상을 떠난 '조안 리'(1945. 3. 8 - 2022. 9.16)다. 그녀의 둘째 딸이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며 한 말이었다.

실로 '세기적 로맨스'라 불릴만한 사랑의 여주인공이자 그에 못잖은 열정으로 세계를 누빈 1세대 여성사업가다.


내게 있어 조안 리와 마릴린 먼로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0.1ml도 안될 향수의 연무로 조우한다.

세상에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을 향을 남기고 사라진 것이다. 그 향은 결코  No.5로 번호가 매겨진 대기업의 인공향이 아니다.

조안 리에게는 세상에 맞선 갑옷이었고 마릴린 먼로의 잠옷이었던 것은 그 향일 수 있으되 그녀들이 남긴 깊고 그윽한 향기는 아름다운 인간에게서만 나는 그 무엇이다.


언뜻 전혀 다른 삶을 살다간 두 사람이다. 공통점이라고는 애용한 향수가 같다는 정도인데 정작 나는 그녀들에게서 또다른 비슷한 향을 맡는다.

비교적 덜 알려졌지만 마릴린 먼로는 많은 명언을 남겼다.

"한 여자가 원하는 건 남자들은 다 똑같지 않다는 걸 증명해 줄 단 한명의 남자 아닐까요?"

불행히도 마릴린 먼로의 바램은 이뤄지지 않았고 조안리는 영혼을 뒤흔들어 놓은 한 남자를 만났다.

정해진 사제의 운명을 돌려세워 사랑을 선택한 남자, 그는 서강대 총장이었던 케네스 킬로렌(Kenneth E. Killoren, 한국명 길로연)이었다. 조안리는 인생 최고의 결정은 결혼이었노라고 서슴없이 밝혔다.


마릴린 먼로는 "나처럼 영화배우가 되겠다고 꿈꾸는 여자가 수천명은 될 거예요. 그렇지만 걱정하지 않아요. 내가 가장 열심히 꾸니까"라며 그 자신감과 열정으로 대스타가 됐다.

조안리는 자신의 선택과 운명에 후회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꿈과 야망을 성공으로 이끈 비즈니스 우먼이었고 홍보계의 전설로 남았다.


때로는 간절히 원하고도 엇갈린 노선이었고 성취는 이뤘지만 분야가 달랐던 두 사람에게서 향수만큼 뚜렷하게 일치되는 성향이 있다.

마릴린 먼로 사후 그녀가 '율리시스'까지 탐독한 엄청난 독서광이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조명받았다.

조안리 역시 학교 도서관에 틀어박혀 온종일 책읽기를 즐긴 내향적인 여학생이었다.

두 사람 모두 책을 사랑하고 즐긴 것이다.


나는 두 사람의 남다른 삶, 숨겨진 재능의 뿌리에 책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잠시 인간의 후각을 자극하는 거죽에 뿌려지는 인공합성물의 화학적 반응이 아니라 내면 깊숙한 곳에서 생성되는 진실되고 성숙한 인간의 향기를 영원히 퍼뜨릴 수 있는 것이다.


그 향은 세기가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고,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맡을 수 있는 매혹적이고 황홀한 향이다.


#진정한_여왕_조안리를_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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