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성훈 Oct 08. 2022

저도 애인 있어요

이제껏 첫 눈에 반했다가 거듭 반하고, 놀랬다가 다시 놀라게 하는 여성은 거의 없었다.

그런 면에서 아니 에르노는 내게 독보적이다. 어떻게 그를, 아니 그의 책을 접하게 됐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서점에서 뒤적거리다 우연히 읽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미모의 젊은 여성작가인 줄로만 알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작가의 약력을 안보고 본문을 읽고 난 후에야 찾아본다)

책 표지 탓이다. 그렇게 최초로 읽은 작품이 '한 여자'다.


어느 비평가가 그의 글을 두고 '건조하다'는 표현을 썼던데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드라이(dry)한 게 아니라 매트(matt)하다. (아마 그 비평가가 인문계 출신이라 물성이나 디자인을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다.) 예리하거나 날카로운 시선이 아니라 서늘하고 무심하게 응시한다.

때론 처참한데 비굴하지 않은 이야기를 간결하지만 담대하고 솔직하게 쓴다.


어느 의류광고 카피처럼 '그녀의 문장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게다가 이토록 아름다운 미모의 여성이라니.

'한 여자'를 읽었으니 "남자의 자리'를 찾아가는 식으로 그의 삶 구석 구석을 탐색했다.

상투적인 '작가로서의 문학 세계...'는 그에게 걸맞지 않는 외투일 것도 같다. 스스로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했으니.

나는 한동안 그의 매력과 작품세계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은 없다. 아마 읖조리는 듯한 약간은 허스키한 보이스가 아닐까 상상해본다. 아니라도 상관없다. 불어도 모르는데 굳이 찾아듣진 않을테니까.

그가 202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자주 찾던 몇 안되는 단골 숨은 맛집이 TV 프로그램에 노출된 것마냥 왠지 아쉽다.

그래서 나는 <1박 2일> <생활의 달인> <3대천황> <수요미시회>같은 프로그램을 즐기면서도 은근히 불만스럽다.

마치 인간들 손에 밀림이 훼손되면서 서식지가 쪼그라드는 우랑우탄 신세가 되는 것 같아서다.


아니 에르노는 1940년 생이다. 우리 어머니(1941) 연배다. 그러니까 할머니다.

글에 반하고 미모에 반했다가 나이에 놀랐었다.

이번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은 다시 한번 놀라게 한 셈이다.

기사를 들춰보니 '불신의 시대, 칼 같은 글'이란 타이틀이 눈에 띈다.


도대체 1940년 그 즈음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니 에르노는 불신의 시대에 칼같은 글을 쓰고, 어머니는 칼같은 말을 하신다.

두 분 다 중세시대 전사의 현신인지 왠 칼을 그리 휘두르시는지.


"늙은이들은 투표 못하그로 해야 돼. 선거도 못나가게 법 맨들고...."

20세기 민주국가에서 이 무슨 터무니없는 말인가 싶지만 당신 논리는 나름 정연하다.

당신이 살아보니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니 늙을 수록 정보에도 어둡고, 판단력도 흐려지더라는 것이다.  

퀘퀘묵은 옛날 사고방식만 고집해서 바뀌는 세상에 적응을 못해 당신들 세계에만 빠져있는 우물안 개구리가 되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국가 대계를 좌우하는 투표권을 행사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지도자가 되냐는 주장이시다.


"젊은 사람들이 쎄빠지게 벌어서 내는 세금으로 노인복지회관도 짓고, 지하철하고 버스도 공짜로 타는데 갸들이 하자는대로 늙은이들이 따라줘야 어른이지.

무슨 눈도 침침해서 엇다 찍어야 할지 헷갈리는 늙은이들이 투표한다고 줄을 서고, 책도 안읽고 말귀도 못알아듣는 것들이 무슨 국회의원을 한단 말이고? 산 날보다 갈 날이 얼마 안남은 것들이....."


"다 필요없고 집집이(집집마다) 지 새끼들 제대로 키우면 된다. 학원 뺑뺑이 돌리고, 서울대 보낼 생각만 하지말고....

어른한테 인사 잘하고, 친구 잘 사귀고,  선생님 말 잘듣고 아이고 무시라(무서워라) 요새 얼라들은 뭔 말을 지 부모한테 듣고 컸는지 선생님 알기를...쯔쯔

여하튼 밥 잘 묵고 잘 뛰어댕기고... 햄같은 거, 거 배달음식이라카나 그런 것도 먹이지 말고 요새 세상 얼마나 몹쓸 인간들이 오죽이나 많나. 지 새끼 묵을 거는 애미가 챙기야지.


세상을 우째 살아야 되는지 애미 애비 지들이 보여주믄 된다. 그기 공부라. 얼라들은 부모 등짝 보고 크는 긴기라.

그 새끼들이 커서 나라 잘 살그로 만들고 다 지 애미 애비, 우리 늙은이들 먹여 살리는 거 아이가. 얼마나 소중하노?

얼라들 사람답게 사는 법 가르치고, 제대로 사람 만드는 거 말고 더 중요한 대사가 어디 있겄노.  그기 애국이지 별기야(별거냐)?"


그런데 왜 당신은 이번 이사에서 그토록 자식 말 안듣고 당신 고집대로 하셨던 건지 고개가 갸웃해지긴 한다.

이사 간 집 거실 벽에다 "삼종지도(三從之道)"을 걸어둘까보다.


※ 아니 에르노의 수상과 윤석열차의 금상 수상을 동시에 축하하고,

학생작품에 온갖 해꼬지를 해대는 덜떨어진 어른들을 '쪽팔려'하며....

작가의 이전글 거미의 자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