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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문성훈
Mar 05. 2023
이런 게 궁합
이런 게 궁합
"여보 일로 와봐!" 나는 크리스마스 선물 상자를 여는 아이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주문한 만년필들이 도착했다. 나는 옷이건 책이건 무엇을 사든 태그나 상표부터 떼어버린다. '이미 선택했고 다시 되돌릴 순 없어' 일종의 의식이다.
산 지 몇년이 지난 차의 선바이저 비닐 포장을 떼어내지 않는 막내동생을 이해하지 못하고, 스마트폰은 사자마자 보호 필림부터 떼어버린다.
기대 수준이 낮으면 만족은 더 커지는 법이다.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다.
꼼꼼하게 살피고 후기까지 챙겨 읽고 주문한 제품이긴 하다. 하나하나 잉크를 주입한다. 이제 완전히 강을 건넜다. 필기감이 좋다. "오. 괜찮다. 좋은데...." 냉정한 내부 무자격 비평가의 검증도 통과했다.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뭔가 써야만 할 것 같다. 막 쓰고 싶어진다. 그다지 주의깊게 읽은 책 대목이 아닌데 그럴 생각도 없었는데 노트에 필사를 한다. 이 순간 얼마나 의미 있고 심금을 울린 문장인가 하는 따위는 안중에 없다.
그저 써갈기고 싶을 따름이다. 나는 싸구려 중국제 만년필이 내게 내린 명령을 떠받드는 부하가 되기를 자처한다.
영혼을 뒤흔드는 책이 내리는 명령이 그러하다. 그렇다고 사극의 한 장면처럼 "마땅히 지킬지어다." 혹은 "네 이 놈, 무얼 하고 있는게냐. 명을 받들지 않고..." 호통치는 건 아니다.
어깨를 어루만지면서 쿠키 담은 접시와 함께 내미는 커피 향처럼 그윽하게 넌즈시 권한다.
"너도 한번 써보지 않으련...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 너만 간직해도 돼"
최근에 읽은 책들이 좋았다. 세상의 책 중에 나쁜 책은 없다는 말은 절반 쯤 맞는 얘기다. 자신의 정체성, 주관, 이상 혹은 취향이나 관심사와 파동이 맞는 책이 좋은 책이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불순한 의도로 버려질 것을 알면서, 자신을 윤색하기 위해 지면을 낭비하는 책들이 얼마나 않은가.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마음에 드는 펜은 쓰게 만들고, 훌륭한 책도 쓰게 만든다. 좋은 펜은 미끄러지고, 좋은 책은 부드럽다. 펜과 책은 그래서 천상 궁합이다.
"사람은 책을 쓰고 책은 사람을 쓰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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