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우즈베키스탄에 과일 바구니를 쏟았다
혀가 저린 달콤함
이전엔 없던 습관이다. 과일 코너에 가면 플라스틱 상자나 봉지에 쓰인 당도 측정 표시를 찾는다. 숫자 12 이상이 찍혀 있으면 단맛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달까, 맛있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당도 측정 단위로 11 브릭스 이상이면 '매우 높은 당도'라는데, 어느새 12 이상은 먹어야 달달하게 돈 값했단 생각이 든다. 그래도 단맛 보장에 망고 향까지 난다는 샤인머스캣이나, 걸그룹 소녀가 두 손으로 쥐고 먹을 법한 왕 딸기 같은 건 여간해서 손대지 않는다. 포도가 망고 맛이 난다니 맛이야 있겠지만, 사과맛 나는 사과나 귤맛 나는 귤을 장바구니에 넣는 편이다. 비타민 보충용 과일을 빼긴 어렵다.
그러다 보니 과거, 당도나 가격 걱정 없이 과일을 사던 때가 그리워진다. 시장 가판대의 포도 열에 아홉은 샤인머스캣 보다 달고 씨 없이 아삭했다. 그뿐인가. 허연 당분이 자줏빛 껍질 위로 소복이 올라온 아기 주먹만 한 자두, 살이 통통하고 과즙이 풍부한 체리는 몇 킬로씩 사놓고 질리도록 먹었다. 이 외에도 살구, 무화과, 수박, 멜론... 한 번 먹어보면 찬양할 수밖에 없는 과일들이 중앙아시아에 있었다. 만약 누군가 내게 9년 넘게 살던 카자흐스탄의 어떤 점이 가장 그립냐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과일을 꼽을 것이다.
그곳의 과일은 브릭스 표시 없이도 믿고 살만큼 달고 맛있다. 과즙이 풍부하고 껍질은 얇고 과육도 실하다. 건조한 대륙성 기후와 일조량 덕분이다. 소련의 '과일 바구니'를 담당했던 우즈베키스탄은 한 여름 기온이 60도를 육박하는 데다 비도 많이 오지 않는다. 자연히 광합성 시간이 길어 이를 통해 지속적으로 만들어지는 당분이 과실에 오롯이 저장되는 것이다.
당도를 보면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먹는 '설탕' 수박의 당도가 12~13 정도일 때 그곳의 일반적인 멜론은 평균 당도 15 브릭스를 넘어 20 브릭스를 상회한다. '토르페다', 한국어로 '어뢰'를 뜻하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 길쭉하고 묵직한 우즈벡 멜론은 그 달콤함에 혀와 목구멍이 저릿할 정도다. 인위적으로 만든 메로땡에 버금가는 달콤함이다. 망고나 바나나 같은 열대 과일처럼 녹진하기보단 좀 더 싱그러운 단맛이다.
가격도 저렴하다. 살구든, 자두든, 포도든 중간 사이즈 대야에 수북하게 담아도 한국돈 5천 원을 넘기 어렵다다. 현지에 살던 당시 수박은 한 통에 천 원 안팎이면 먹을 수 있었고 지금도 2천 원 내외이다. 시장에서도 저마다 인심 좋게 맛을 보여주면 먹어 본 자는 엄지를 치켜세우며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기 바쁘다.
이 좋은 걸 한국에서도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현재까진 저장 시설, 운송 거리와 이에 따른 비용 탓에 수급이 쉽지 않다. 비교적 무른 과일을 운송할 때 필요한 냉동, 냉장처리 기술이나 시설이 부족한 데다 육송, 해송 모두 거리가 멀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
그럼에도 이들이 수출에 대해 특별히 고심하지 않는 이유는 중앙아시아 5개국과 동유럽 등의 수출만으로 자체적인 소비가 충분히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맛을 아는 사람만 아쉽다. 최근 제천에서 우즈벡 멜론(듸냐) 종자의 시범재배가 성공했다는 소식도 있지만, 실제 유통 되기까진 기다림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에 온 이상 저렴한 과일도 당도 높은 프리미엄 과일로 변신해 비싸지는 건 아닌가 걱정도 되는데, 샤인머스캣처럼 비싸지더라도 비행기 값 안 내고 먹는다 생각하면 가성비 있다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람이고 과일이고 뜨겁게 담금질된 후에야 진하고 향기로운 과즙을 품는다. 목이 타게 갈증을 겪뎌내고 맺은 결실은 그 가치를 따지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