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들에게는 아낌 없이 애정표현은 하지만, 아내에게는가부장제 노동과 의무를 당연시 하는 남편. 그 안에서 독립하기 전까지는 적극적으로 가부장제를 깨지 못한 자녀인, 81년생인 나.
대학 교육 과정 속에서 만난 선후배 및 각계각층의 리더들, 한국사회에서 당시엔 나름 진일보한 조직에 몸 담게 되며서 원가족 가부장제에 큰 문제가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2016년 作 조남주 작가의‘82년생 김지영’을 읽고‘81년생인 나’와 김지영은 어쩌면
동일인물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김지영은 나와 닮아있었다.
한국 가부장제의 뿌리인 장남이 종손이 되어 대를 잇는다는
전통 유교사상이 지배하는 집안의 장녀. 일 년에 집안제사만 12번,
어머니는 아들을 낳기 위해 내리 딸 셋을 낳고 나와
12살 차이가 나는 아들을 품에 안고서야 생에 이뤄야 할 모든 것을 이룬 사람이 되었다.
이후의 삶은 그야말로 소설 속‘김지영’ 혹은 그녀의 언니와 흡사한데,
돌이켜보면 내 주변 내 또래 다수 여성들 역시 비슷한 환경에 놓여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작품이 우리 사회 큰 반향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역시 뿌리 깊은 ‘가부장제’가 중심에 있다.
당시 가정과 가족구성원의 삶을 뒤흔드는 다양한 상황적 요소들은
80년대 생 여성들뿐만 아니라
동시대를 살았던 한국여성 다수에 적용되었던 것이다.
가정의 경제적 상황, 부모의 직업, 거주지역 등에 따라 편차는 있었겠지만
체감 정도의 차이일 뿐 한국여성이 머무는 다양한 공간에서 실존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어째서 이런 불평등 현상이 죄책감 없이 대를 이어가며 진행될 수 있었던 걸까?
<사진 설명> 82년생 김지영, 민음사 책 표지
미국 사회운동가 벨 훅스는 <경계 넘기를 가르치기>에서
"서비스업, 특히 가사노동의 가치를 다룬 글이 너무 부족했다.(...)
아이들과 성인은 가사 일을 배우면서 자신의 주변을 정돈해야 하는 책임을 받아들이고, 주변 환경을 올바로 인식하고 돌보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가사를 배우지 않는 남자아이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들은 주변을 배려하지 않는 어른으로 자라나고 자신과 가족을 돌보는 법을 잘 알지 못한다"1)
이처럼 여성 노동에 대한 저평가는 교육을 통해 자연스럽게 아랫세대로 전달된다.
때문에 여성들은 더더욱 남아 선호에 매달리고 자신을 옭아매는 가부장제의 변호인이 된다.
여성 스스로가 여성의 사회적 가치를 폄하하고 때론 아버지 세대 나쁜 남자 옹호에 앞장서기도 하니 말이다. 본고를 통해 <82년생 김지영>을 발화점으로 드러난
한국 사회 가부장제와 성차별의 역사를 들여다보고
한국 페미니즘의 한계와 성장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가부장제'는 한국에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나이지리아 태생의 세계적인 페미니스트인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엄마는 페미니스트>를 보면 태평양 북서쪽에 사는 미국인인 지인이 한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놀이방에 갔을 때의 경험이 등장한다. 당시 놀이방에 갔을 때 딸 가진 엄마들이 계속 “만지지 마.”나 “그러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고 하면서 굉장히 아이를 제지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아들을 가진 엄마들은 좀 더 돌아다니라고 부추기는 광경을 목격했다는 것. 2) 여자아이한테는 자유보다 제약을, 남자아이한테는 제약보다 자유를 더 많이 준다는 것은 아시아뿐 아니라 태평양 넘어 미국이라는 사회에서도 적용되고 있다.
“한국의 베스트셀러 소설의 주인공‘김지영’은 너무 평범하다. 그것이 핵심이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미국 출간 소식을 전하면서 이렇게 보도(22.4.8.)했다. NYT는 “82년생 김지영에는 특별히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없다”면서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각종 통계에 주목할 것을 당부했다. 여성이 처한 삶을 드러내는 지표들이기 때문이다. 소설가 엘리프 바투 만과 링 마는 “82년생 김지영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공포 스릴러물”이라고 평했으며 “한국에서 82년생 김지영은 기생충처럼 예술 작품인 동시에 사회적인 논문으로 받아들여졌다”라고 밝혔다.
이 같은 반응은 전 세계적으로도 '가부장제' 안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삶이 익숙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또한 가부장적 남성의 모습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왔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에게 익숙한 ‘남성성’은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문화평론가 최태섭은 <한국남자>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남자다움의 기원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며 역사학지 조지 L. 모스 <남자의 이미지>를 통해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 탄생된 남성성의 이상형은 평범한 남자들의 생활상이 아닌 사회들이 만들어내고자 했던 이상적인 남자상 3) ”이라고 밝힌다.
그는 그리스에 대한 선망에서 출발해 기독교적 영향력 약화, 신흥 부르주아의 탄생,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이상형은 강화되었다고 설명하는데,“남성성의 이상형의 가장 큰 문제는 그 이상형에 맞는 남자를 현실에서 찾는 것이 어렵다는 것”4)이다. 결국 이러한 헤게모니 속에서 이상형에 도달하지 못한 남성은 패배주의로, 여성들은 그 이상형을 만들기 위한 사회 속에서 자연스럽게 ‘아웃사이더’가 되어 비난과 차별을 받고, 불평등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가부장제'를 극복하기 위한 여성들의 돌파구 찾기
허상이나 다름없는 이상형 화된 남성성 아래서 핍박받으며 살아온 어머니들을 보며 80년대 생 여성들은 중 자연스럽게 가부장제를 답습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이를 극복하기 위한 개별적 또는 집단적 노력들도 있어왔다. 남성 못지않게 고등교육을 받으며 사회에 나와 21세기를 살아가는 여성들은 이상적 남성이 허상임을 깨닫게 된다. 허상을 붙들고 살아서는 답이 없다는 것도 깨닫는다. 때문일까? 올해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만 40세까지 비혼’인 여성 비율이 30년 새 10배 늘었다. (KOSTAT 통계플러스)
조남주 작가는 몇몇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듯, 출산과 육아로 경력단절을 경험하고 주요 공중파 방송사의 시사프로그램 구성작가의 길을 멈추고 소설을 집필했다. 이는 동종업계에 있다가 비슷한 시기에 육아·가사병행이 수월한 근무환경을 이유로 공공기관으로 업무조건을 바꾼 나의 경우와도 같았다. 사회적 활동을 계속 이어가지만 육아·가사도 아직은 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성역할을 거부하면서도 전통적 성역할도 놓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김지영과 나, 그리고 조남주 작가의 공통점인 ‘80년대 생’은 어째서 일과 살림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고군분투하게 된 것일까. 이 지점에서 이들 세대의 특성을 중심으로 교차적으로 고민해 볼 필요가 있겠다. 우리나라 80년대 생 기혼 여성의 13%이 자녀를 낳지 않았다고 한다 5). 1920년~1960년생 2.0~3.0%, 1970년생 4.8%와 비교하면 두 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연구를 맡은 박시내 사무관은 이러한 결과가 “자녀의 필요성과 부모 역할 등 가족 가치관의 요인이 크며, 출산에 따른 기회비용과 경력단절 등 경제적 요인, 전통적 성 역할과 가족주의 가치관 붕괴 6) ”등을 큰 요인으로 꼽았다.
그나마 아이를 하나 낳은, 요즘 시대 평균 출산율대로인 소설 속 김지영도 딸 하나, 나 역시 초등생 딸 하나를 힘겹게 키우며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던 것이다.
80년대 생 밀레니얼맘으로 살기
일하는 80년대 생 여성의 육아는 아이에만 집중된 것이 아닌 엄마 자신의 삶도 중요시하고 이를 위해 자신에게 투자하는 시간과 경제비용이 발생된다는 점에서 이전 세대와 차이가 있다. 현대자동차 계열 광고 회사 이노션 월드와이드의 인사이트전략팀이 펴낸 ‘2020 팔리는 라이프스타일 트렌드’에 따르면 1980년대 생인 ‘밀레니얼맘’은 "가족을 위해 희생하던 어머니 세대와 달리 자신만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자기를 위한 투자도 아끼지 않는다"면서 "개성이 강해 규정지을 수 없다"라고 규정한다.
또 다른 보고서‘다음소프트 생활변화관측소가 펴낸 ‘2020 트렌드 노트 혼자만의 시공간’에서는 1980년대 생 부모에 대해 “육퇴”를 외치며 내 시간을 더 소중히 하는 이기적인 엄마가 되거나, 죄책감을 느낄 바에야 전통적 엄마 역할을 하면 되는데 내 안에 두 자아가 있기 때문에 육아를 힘들어한다 “고 분석하기도 했다.
분명 시대변화에 따라 여성의 성역할도 변모하고 있는데 반해 ‘출산·육아’에 있어서는 충실하지 못해 죄책감을 갖는 아직 전통적 성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해 번민하고 있는 세대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밀레니엄 여성들은 다수가 자녀 포기를 통해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찾아가고 있다. 82년 생 김지영 역시도 어려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자신을 사회적 직업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었다.
벨 훅스는 "일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는 것은 미국의 페미니즘 문화에서 몹시 중요하다. 일의 본질을 재고해 보는 일환으로 여성들은 일을 가치 있게 생각하도록 배워야 한다"7) 고 강조했다.
그레이스리&제임스 보그스는 <20세기의 혁명과 진화>에서 "인간이 일 없이 존재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일의 새로운 윤리는 무엇보다도 일이 인성개발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과 함께 시작된다.(...) 우리는 일에 대한 두 가지 태도를 양극으로 나눌 필요가 있다. 하나는 일이 인성을 파괴한다고 보고 일을 싫어하고 하지 않으려 하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일을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발전시키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라고 받아들이는 태도이다"라며 벨 훅스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런 흐름은 유리천장을 깨는 여성들의 도약을 목격하게 한다. 2020년 LG그룹의 신규 임원 인사는 이런 점에서 이목을 집중시켰었다. 34세 마케팅 부문장 심미진 상무와 38세 오휘마케팅부문장에 오른 임미란 상무, 39세 태스크리더 김수연 수석전문위원 등이 그들이다. 하지만 여성의 업무적 특성에도 한계점이 있다. 앞서 밝힌 LG의 이례적인 여성임원 승진 사례의 경우 여성고객을 타깃으로 한 화장품과 생활용품 관련 사업의 마케팅 부문에 한한다. 파격이라고 하기에는 워낙 여성 강세인 시장에서의 이유 있는 발탁인데, 그럼에도 그동안 이런 자리에도 남성들이 요직을 점하고 있었다는 점이 또한 변하지 않는 남성 중심의 조직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여성 지위 향상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는 80년대 생 여성의 경제활동인구 생존율(통계청)인데 2015년 상층 노동시장 생존율에서 60년대 여성은 10%에 채 못 미쳤지만, 70년대 생 10% 후반, 80년대 생은 30%가량으로 생존율이 높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은 이들 80년대 생 여성들이 20대 후반이던 2004년의 통계를 보면 이들의 상층 노동시장 생존율은 40%가량이었다는 점이다. 10% p에 해당하는 여성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출산과 육아는 80년대 생 여성들에 와서 이 자본주의 노동시장에서의 생존율을 높이긴 했지만 여전히 다수의 여성들은 이전 세대와 다름없는 차별의 환경에 놓여있다. 우먼파워가 강해졌다고들 하지만 여전히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시장과 여성의 성역할 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사진 설명> 영화 82년생 김지영 포스터 (출처 :나무위키)
‘82년대 생 김지영’을 넘어서
2015년 이후 한국 여성에 대한 사회 차별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있음은 사회적 변화를 통계로 보여준 언론보도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실제로 1990년대 여성에 대한 보도량은 2,700여 건에 불과했지만 2015년까지 '여성'키워드를 포함한 보도는 2015년까지 17만 4천여 건으로 꾸준한 증가세를 보였다. '육아'에 대한 언론 보도는 “1990년대 '어린이집', '보육시설', '주부들', '엄마들', '맞벌이 부부', '남녀고용 평등법', '가사노동'등이었다. 2000년대에도 비슷한 단어가 나타났지만 '출산휴가'나 '대체인력' 등의 새로운 트렌드를 보여주는 단어들도 등장했다. 비율은 높지 않지만 '남성들'이나 '남편들'이라는 단어도 나타나기 시작했다.”8)
2016년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출간 이후도 많이 달라졌다. 작가 조남주는‘김지영’ 콘텐츠를 통해 한국 여성들이 자기 동일시를 하게 됐으며, 이를 통해 영화콘텐츠와 다양한 언론미디어를 통해 보편성을 획득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한국사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미국, 일본을 비롯해 세계 각지로 퍼지고 있는 세계 여러 나라의‘김지영’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제3세계 여성 그룹을 지칭하는 서발턴 그룹에 대해 스피박은 과연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었다. 정해진 대답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째서 말하지 못하게 되었나,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면 문화연구가 조흡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에 대해 문화연구가 조흡은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이런 여성 차별의 사례가 지속적으로 나열된 까닭에 '과잉'의 위험에 빠진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영화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이 과장된 모습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복사하듯 열거하고 있어 남성들이 이를 쉽게 반박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라고 밝힌다.
"여성들이 차별 폐지를 크게 외치고 있지만 아직 큰 변화가 없는 것은 그들의 목소리가 작아서가 아니라, 지영의 남편(공유)처럼 제 생각에 빠져 상대의 목소리를 먼저 듣고 이해하려는 공감 능력의 부족에서 비롯된 문제"9)라는 것이다. 핏대 세우고 목이 터져라 외치는 것은 순간적으로 주의를 집중시키는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지속적인 공감과 이해를 끌어내는 것은 그들의 '듣기'가 가능해져야 하며 '듣기'에 초점을 맞춰 우리의 '말하기'도 이어가야 할 것이다.
일상 속 페미니즘
여전히 한국사회 내, 넓게는 전 세계적으로 가부장제는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그 안에서의 여성의 성역할은 전통적 성역할을 완벽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는 있다. 하지만 결혼과 자녀를 선택하고, 가족과 일정분의 가사·육아의 역할을 나누며 사회 내 생존을 위해 개인 각자가 노력한 결과 조직 내 업무 영역의 한계는 있으나 유리천장을 뚫고 나오는 사례가 늘고 있다.
나 자신도 방송의 영역에서 공공서비스의 영역으로 나의 영역을 넓혀 일과 육아를 남편과 나누고 병행하면서 엄마이자 사회인 등의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 나가고 있다는 것, 2017년을 기점으로 문학계와 기업조직, 경제, 공공의 영역까지 여성과 남성이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으려는 의식화가 이뤄지고 있다.
찬드라 모한티는 “여성과 남성이 안전히 그리고 충분히 건강하게 통합되는 상황 속에서 자유롭게 창조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세상. 원하는 사랑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함께 거주할 사람도 자유롭게 선택하는 세상. 자유롭고 상상력이 충만한 정신의 탐구를 기본적 권리로 하는 세상, 인간 행복의 물적 기반으로 경제적 안정, 환경의 지속, 인종 간의 평등, 부의 재분배 등이 갖춰진 세상”10)을 이상적 세상으로 두었다.
일상 속 페미니즘을 통해 하나씩 실천해 나가는 우리의 하루하루가 중요해지는 시점이다. 모두가 공존하며 동일한 사회서비스를 공유하는 인간 대 인간으로 아니‘함께 인간’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을 기대하게 해 보며,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겼던 사회적 모순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