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드퓨처 Mar 13. 2023

일본 출장 때마다 드는 생각


일본 출장 때마다 드는 생각은, 아주 오래된 서적이 먼지 하나 없이 관리되어 질서 있게 꽂혀있는 서점 같다는 것이다. 신기한 책도 서점도 오래되었지만 그 모습이 낡았다기보다는 유서 깊게 느껴지데 있었다. 지식과 정보가 유효 기간이 지나 버려지면 쓰레기가 되지만, 잘 정리되어 책장에 꽂히는 순간 역사가 된다.


최초의 역사서인 헤로도토스의 '역사'도 후배 학자들의 정성 어린 관리가 없었다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사라진 건 단순히 책 한 권이 아닐 것이다. 아테네와 로마 사이에 벌어졌던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관한 살아있는 기록 모두가 사라진 것이리라.


나는 직업이 연구원이라 대부분의 출장 목적은 공동연구를 위한 논의 및 신기술 파악이다. 이번 일본 출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간지 나는 팬시한 기술보다는 투박해 보여도 실용적인 그것이 넘쳐나는 데가 바로 일본인 것 같다. 실용을 지향한 노력은 25명의 노벨 과학상 수상자 배출로 이어졌다. 아직 노벨 과학상 수상 개시도 못한 우리로선 그저 부러울 뿐이다. 


노벨상을 수상한 일본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일본 교토대 의대 혼조 다스쿠 교수이다. 그는 텍사스 주립대 면역학과 제임스 앨리슨 교수와 함께 최초로 CTLA-4와 PD-1이라는 면역관문을 규명하였으며, 이 것을 통해 암세포가 T세포의 작동을 억제한다는 것을 밝혔다. 두 사람은 이 공로로 2018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이후로 다수의 면역관문 억제제가 임상과 FDA 허가를 거쳐서 시판되고 있다. 수십 년에 걸친 과학자의 끈기가 꿈의 항암제를 탄생시킨 것이다.

 

출장 중에, 개업한 지 100년이 넘은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1905년에 개업을 했다는 사장님의 설명에는 자부심과 장인 정신이 녹아 있었다. 식당 역시 오래된 건물이지만 낡아 보이기보다 유서 깊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음식 하나하나에 대한 설명은 통역을 거쳤음에도 희석되지 않는 정갈함이 느껴졌다. 세대를 넘나들며 고민한 흔적은 음식 맛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고 제대로 된 사과 조차 하지 않은 건 명백한 사실이지만, 배울 점도 분명 존재하는 나라라는 사실을 또 한 번 확인한 출장이었다. 연구와 끈기가 만나 탄생한 꿈의 항암제, 100년이 넘어도 여전히 혁신 중인 식당. 이것이 합쳐져 헌책방도 고서점이 되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온천으로 유명한 후쿠오카 벳푸였지만 바쁜 탓에 발 한 번 못 담그고 온 게 아쉽다. 다음엔 시간을 쪼개서라도 꼭 나의 발자취를 남겨봐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