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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드퓨처 Aug 23. 2021

원근을 무시한다고 다 피카소인가?

추억의 힐링 그림


작년 초에 퇴임한 후 가족들과 꿀 같은 추억들을 많이 쌓았다. 코로나로 집콕하던 아이들에게 밥을 해주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요리를 하게 되었고, 멀리는 못가도 함께 나들이도 다녔다. 혼자 있을 땐 글 쓰고 그림도 그렸다. 20여 년 만에 느껴본 행복이었다. 이렇게 가까이에 행복이 있을 줄 미처 몰랐다. 작년 가을, 아이들과 내가 그린 그림을 놓고 대화하던 추억을 소환해 봤다.




그저 힐링하려고 취미 삼아 시작한 그림 그리기가 나에게 완벽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완벽주의가 또 도진 걸까? 그럼 재미 없어질 텐데.. 재미로만 그리기로 다시금 다짐해본다. 스마트폰 갤러리에 저장된 사진들이 그림 그리기의 모델이 되어 가고 있다. 지난여름 아들과 갔던 부암동 석파정 서울미술관 사진 중에 정원에 있는 사랑채와 안채에서 내려다본 기와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끌렸다.



그래서 한 번 똑같이 그려봤다. 이번에도 지웠다가 다시 그릴 수 있어 좋은 디지털 드로잉으로 그렸다. 



완성하는데 세 시간도 더 걸린 것 같았다. 무언가에 이렇게 몰두해보기는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았다.

그리고 나서 비평가에게 보여줬더니 역시 날 선 비평이 쏟아졌다. 


비평가 1: "왼쪽 기와가 좀 이상한데.. 기와와 지붕 사이가 너무 하얗고 기와에 음영 처리가 안 돼있어."


그래, 그림에는 적어도 부모 자식 떼고 얘기해야지, 하고는 정성스레 그림을 고쳤다.



이번에는 비평가 1, 2 모두에게 평을 들어봤다.


비평가 1: "기와는 좋아졌는데, 뒷배경에 있는 숲이 원근감이 없어서 마치 인위적 배경 화면 같아. 나머지는 그런대로 괜찮네."


비평가 2: "기와는 원근을 넣어 입체로 그린 데 반해 앞뒤 나무는 입체감이 없어서 서로 대비가 되는데.. 좀 이상하긴 하지만 아빠의 스타일로 밀면 어떨까?, 뭐 좀 이상하면 어때? 그림을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는 아저씨가 이 정도 그리면 잘하는 거지!ㅎㅎ"


나는 슬쩍 물었다.


"나무에 원근을 넣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니?"

"아빤 지금 당장은 그거 못해! 한참 배워야 되는데.."


하면서 스마트폰에 자기가 그린 나무 그림을 보여주는데, 깜짝 놀랐다. 꼭 사진인 줄 알았다!


두말 못하고 나무는 내 스타일대로 밀기로 했다.

"하긴 20세기 거장 피카소도 원근을 무시하지 않았겠니?"


아! 이 말은 하지 말걸..

비평가 두 명이 씩 웃으면서 동시에 얘기한다.


"뭐? 피카소?ㅎㅎ"

"원근을 무시하면 다 피카소인가?"




비평가 1은 예술의 전당 어린이 미술 영재 아카데미 출신 아들이고, 비평가 2는 올해 미대에 입학한 디자이너를 꿈꾸는 딸이다. 큰아이는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취미를 전공으로 삼은 것이다. 내년에 중학생이 되는 아들도 누나의 길을 갈까 고민 중인 것 같다. 무언가에 자신 있어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흐뭇한 마음이 든다.


불과 1년 전 일인데 벌써 추억이 되었으니, 새삼 시간의 속도가 느껴진다. 지금 이 순간도 내일이면 추억이 되어있겠지. 다시 한번 순간의 소중함을 생각하게 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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