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데리고 아파트커뮤니티에서 운영하는 스카이 카페에 자주 간다. 날씨가 맑으면 남산타워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나는 책 읽고 글도 쓰고, 아들은 숙제하고 좋아하는 그림도 그린다. 작년 봄,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있었던 일이다.
카페에서 찍은 사진, 멀리 남산타워까지 보인다.
함께 카페에 가서 나는 책을 읽고 아들은 숙제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아들이 숙제는 뒤로 하고 창밖을 보며 뭔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슬쩍 훔쳐보니 창밖 전경을 그리고 있는데, 그림이 매우 세밀한 게 상당히 특이했다.
완성이 되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엄청 몰두해 있는 아들의 모습이 기특하기도 해서 그냥 모른 척했다. 거의 두 시간 가까이 꼼짝도 않고 그리더니 드디어 완성했다면서 보여준다.
아들이 그린 카페 창밖의 서울 전망
오~ 얼핏 보니 매우 비슷했다! 또한 세밀함에서 나름의 혼과 열정이 느껴졌다. 원근이나 구도 등 기초 이론을 떠나 왠지 웅장해 보였다. 숙제하랬더니 딴짓했냐고 혼 내려다가 살짝 그림에 감동해서 그만 칭찬을 해주고 말았다.
"와우~ 우리 아들 완전 천재 화가인데!"
아들의 표정이 '이 그림 미술 영재가 그린 거야'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아들은 예술의 전당 미술 영재 아카데미를 3학년부터 4학년까지 2년간 다녔다. 평소 아들은 수십 대 일의 경쟁을 뚫고 영재 아카데미 오디션에 합격한 걸 자랑스럽게 말하곤 한다. 영재 아카데미는 이론에 바탕을 둔 그림 실력보다는 창의와 사고의 다양성 기준으로 선발을 하고 교육도 그에 맞는 프로그램으로 진행을 한다. 따라서 구도와 투시, 원근 등 소묘의 기초 이론은 전혀 배우지 않는다.
이번 그림도 전경을 묘사하긴 했지만 오로지 떠오르는 생각대로 연필이 가는 대로 그린 것이다. 투시나 원근, 입체감이 완벽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빽빽하게 들어찬 주택가의 세밀함과 여백처럼 한산한 뒷 배경의 극렬한 대비가 그림의 주요 특징으로 보인다. 실물과 같고 다름을 떠나 자신만의 스타일을 그림에 입힌 것이다.
4학년 때 그린 비슷한 화풍의 그림 몇 장을 소개해본다.
어느 항구 도시
어느 섬 마을
도시의 빌딩 숲
어느 도시의 모습
내년에 중학생이 되는 아들은 여전히 미술에 관심이 많고 시간 날 때마다 뭔가를 그린다. 물어보니 그림 그릴 때 제일 행복하다고 한다. 열세 살에 벌써 행복의 대상을 찾았다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무엇보다 좋아하는 그림을 바탕으로 자존감을 키워가고 있는 모습이 부모로서 참 흐뭇하다.
올해 미대에 입학한 딸이 취미를 전공으로 선택했듯이 아들도 누나의 길을 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딸에게 그랬듯이 아들도 좋아하는 걸 계속 잘할 수 있도록 우리 부부는 적극 밀어줄 생각이다.
행복의 대상을 업으로 삼을 수 있다면 그 보다 성공한 인생이 또 있을까? 사실 그건 우리 부부도 이루지 못한 평생의 숙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