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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드퓨처 Sep 10. 2021

일만 이천보에 펼쳐진 우리 가족 소통 이야기

한강 야간 산책의 즐거움


지난 일요일에는 오랜만에 네 가족 모두 한강으로 야간 산책을 다녀왔다. 우리 집에서 제일 바쁘신 대학 신입생 딸님도 기꺼이 시간을 내주셨다. 점심을 늦게 먹은 탓에 배가 별로 고프지 않아 저녁 시간이지만 일단 나섰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언제 더웠었냐고 시치미를 떼듯 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한강 가는 길엔 불편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묘미인 것이 있다. 가는 길이 넓지 않은 탓에 네 명이 일렬횡대로 갈 수가 없다. 그래서 두 명씩 짝을 지어 걸어야 하므로 다 함께 얘기하는 건 불가능하다. 여기까지는 불편한 점이다.


그런데 걷다 보면 다 함께 공유하기엔 살짝 불편한 일들을 일대일 대화로 깊게 이어갈 수 있다. 게다가 길모퉁이나 건널목을 지나면서 자연스레 파트너가 바뀌기도 한다.


이렇게 부부와 모자, 모녀에서 부자, 부녀 그리고 남매까지 돌아가며 추억 여행부터 진로 고민까지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며 일대일 대화의 꽃을 피운다. 불편한 점이 묘미로 바뀌는 순간이다.


새로운 일을 시작한 엄마와 아빠의 다소 걱정 섞인 희망의 메시지, 이제 대학 1학년인데 벌써 졸업 후의 진로를 고민하는 딸의 넋두리 그리고 내년에 중학생이 되는 아들의 공부 걱정 등 고민거리엔 서로서로 힘을 불어넣어 준다.


"괜찮아. 잘할 수 있을 거야. 엄마랑 아빠는 지금까지도 잘 해오셨는데 뭘~ 난 아빠랑 엄마 믿어."

어느새 다 커서 엄마 아빠를 격려하는 딸이 기특했다.


"너무 서두르지 말고 너희들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걸 업으로 삼아 즐겁게 일했으면 좋겠구나. 엄마 아빠는 그저 너희들이 하고 싶은 거 모두 할 수 있게 도와줄 거야."


분위기가 다소 무거워질 듯하면 우리 집 분위기 메이커인 딸이 나선다.


"자자~ 우리 저녁으로 오랜만에 엠에스지 팍팍 친 사발면에 삼각 김밥 먹을까?"

"좋지! 난 디저트로 월드콘. 참, 누나는 바밤바지?" 

아들 녀석도 거들고 나선다. 일곱 살 차이지만 연년생 못지않은 찰떡 케미의 남매다.


어느새 집에서 십리나 되는 한강에 도착했다. 우리는 늘 가는 물멍 아지트에 1차 베이스캠프를 치고 멍 때리기에 들어갔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흐르는 강물에 마음을 맡긴다. 해는 완전히 지고 고요한 가운데 물소리와 귀뚜라미 소리만 들린다. 마음속 모든 근심 걱정이 눈 녹듯 사라진다.


우리의 물멍 아지트에서 바라본 반포대교. 노을과 반포대교의 라이트 색이 너무 똑같아서 마치 노을이 반포대교까지 물들인 것 처럼 보인다.


물멍을 끝낸 우리 가족은 2차 캠프인 세빛섬으로 향했다. 딸의 제안에 아무도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으므로 채택된 것으로 보고, 엠에스지 팍팍 친 사발면에 삼각김밥 그리고 디저트는  월드콘과 바밤바로 한강 만찬을 즐겼다. 편의점  앞 벤치에 네 가족이 모두 앉을 수 있었다. 드디어 일렬횡대가 된 것이다. 오면서 나눴던 이야기보따리들을 모두 풀어놓았다.


물에 비친 세빛섬이 더 예뻐보인다.


"엄마! 누나가 전공과목이 너무 어렵대. 1학기 땐 한 과목 드롭했다는데 드롭이 뭐야?"


너만 알고 있으라고 알려준 비밀을 냉큼 일러 받치는 어린 동생을 보고 화를 낼만도 한데 그냥 씩 웃는 걸 보니 누나도 동생의 비밀을  알고 있는 듯했다.


"엄마, 윤후가 이번 주 수학 숙제 하나도 안 했다는데!"

 

남매 사이의 찰떡 케미에는 애정 어린 디스도 포함되어 있나 보다. 아이들의 기대 (?)와는 달리 엄마는 꾸짖기는 커녕 오히려 따뜻한 말로 아이들을 격려해주었다.


"괜찮아. 누나는 전공과목이 어려워서 그랬을 거야. 이번 학기에는 드롭하는 일 다시는 없게 잘하고, 윤후도 숙제 꼭 해가고  알았지? 엄마, 아빠는 우리 딸, 아들 믿는다. 잘할 수 있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분명 올 때의 그 길이건만 왜 이리 멀어보일까? 한강 가는 길에 너무 이야기 꽃을 심하게 피웠을까, 집으로 가는 길엔 서로의 거친 숨소리와 간혹 내뱉는 기합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집에 다 와갈 때는 머릿속 잡념이 리셋되듯 깨끗이 없어져 있었다. 한강 산책의 또 다른 묘미였다.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앱을 확인해보니 8 킬로미터를 넘게 걸었고 이는 11900보에 해당되었다. 아파트를 나와 얼마 이따가 만보기 앱을 켰으니 실제로는 12000보가 훌쩍 넘었을 것 같다.


만보기 앱이 보여주는 산책 기록.


집에 있을 땐 각자 방에서 자기 일 하느라 바쁘고 또 쉴 때는 스마트폰 하느라 가족 간의 대화는 강제 스톱인 경우가 많다. 가끔 가족끼리 외출하려고 해도 꼭 한둘은 선약이 있어 빠지게 되니 참, 딸랑 네 명인데 이리 모이기 힘들어서야..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우리 네 가족 모두 가슴속 깊은 이야기부터 가벼운 에피소드까지, 쉽고 어렵고를 떠나 너무나도 소중하고 살아있는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부모와 자식 관계를 떠나 서로의 고민을 들어주고 진심으로 공감해주며 영혼에 힘을 실어준 일만 이천보의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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