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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드퓨처 Jun 29. 2022

2. 나에게도 봄날은 있었다


비록 퇴임 통보를 받았지만, 나에게도 봄날이 있었다. 신규 프로젝트 기획 자료를 늦게까지 마무리하고, 회사 근처에서 후배 연구원과 늦은 저녁을 겸해 한 잔 하고 있을 때였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는 받지 않는 원칙이 있었기에 무시했다.


잠시 후, 그 번호로 문자가 왔다.


"전화 바랍니다. 기술원장."


헉. 원장님의 번호였구나. 무슨 일이지? 오늘 오전에도 보고 드리느라 뵜었는데, 또 한 소리 하시려고 그러나?


신규 프로젝트 기획으로 원장님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던 터에 문자를 보니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 또 야단치시면 맞지 뭐. 그리고, 될 때까지 설득해야지. 바이오를 전공한 내가 반도체 전문가에게 바이오의 업의 개념을 이해시킨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잠시 밖에 나가서 그 번호로 전화를 드렸다.


"원장님, 안녕하세요? 조금 전엔 제가 식사를 하느라 전화를 받지 못했습니다. 무슨 일이신지요?"

"이번 정기 임원 인사에서 박 수석(연구원)을 상무로 승진시키기로 했습니다. 더 잘하라고 힘을 실어주는 것이니, 마음껏 한 번 해보기 바랍니다. 축하합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한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토록 까탈스럽게 대하시며 당근 없이 채찍질만 해대시던 분이 웬일일까? 당근을 아껴놨다가 트럭이 넘칠 때까지 버티면 주시려고 했던 걸까?


내일 아침 언론에 정식 보도될 때까지는 비밀로 해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식당에 들어온 나는 애써 웃음을 숨기며 하던 대로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아 정말 전화까지 해서 야단을 치시네. 너무 한 거 아니야?"


그렇게 원장님 성토 대회를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집 앞에 꽃집이 보이길래, 결혼 이후 처음으로 꽃을 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생한 아내에게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선물이었다.


"늦었네요. 저녁은?"

나는 말없이 장미 한 다발을 아내에게 건넸다. 황당해하던 아내는 눈치도 없이 물었다.

"갑자기 웬 꽃이에요? 무슨 사고라도 쳤어요?"


나는 비밀 유지 약속을 어기고 아내에게 얘기했고, 아내는 친정과 시댁에 빛의 속도로 알렸다.


양가 친척분들의 축하 전화를 모두 받고 나니 자정이 훌쩍 넘었다.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https://brunch.co.kr/@pjhwan071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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