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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의 값어치

이제 나로서 살아야겠다

'나만의 삶'

말은 할 수 있다.

펜으로 적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 그렇게 느낄 수 있을까.


나는 진정 나만의 삶을 살아왔을까.

행복을 위해,

세상 그 누구 못지않게

매일 부지런을 떨며 무언가 해왔지만,

이제와 새삼 돌이켜 보면

그게 무언지 모르겠다.


단 한 가지.

송곳처럼 날카롭게 찌르는 것이 있다.

'맹목성'

하지만 누굴 탓할 수도 없다.

그 송곳을 찌른 것도 나이기에.


언제부터일까.

무언가에 대한 맹목에 빠져 살아왔던 게.

그래서 되돌아볼 때마다 새벽의 짙은 물안갯속에서

내 시간의 기억을 허우적거리며 찾기 시작했던 게.

하지만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었다.

맹목의 강은 어느새 내 허리 위까지 차올라

앞으로 나아가는 의미마저 잊거나 잃게 만들었으니.


그저, 강이 떠밀면 밀리는 대로

그러다 헛디디면 입까지 차오른 물에 숨을 헐떡이며

그렇게 겨우겨우 내가 살아있다는 것만 확인한 채

지금에까지 흘러온 것일까.


아무리 뒤를 돌아봐도 끝없이 넓은 강이 전부인,

이 맹목의 강은 그 값어치가 참 잔인하다.

기억도 없는 내 지난 시간들을 바쳐야 했으니.


웃긴 게,

이 강의 이름이 '맹목'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순간

마치 어딘가 멀리 모세가 나타난 것처럼

강은 갈라지고 사라져 버렸다.


호랑이 굴에서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더니

정신 차리기까지 몇십 년이 걸린 것인가.

그 사이 호랑이 3대는 굶어 죽었겠지.


이제야 내가 또렷이 보인다.

나.

나는,

텐트 천에 두두둑 떨어지는 빗소리를 좋아하고

밤에 벽을 타고 흐르는 재즈를 좋아하며

아침 일찍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새소리를 좋아한다.

바스락거리는 한낮 볕의 자리들을 밟으며 걷는 산책을 좋아하고

살랑거리는 촛불을 두고 마주 보는 연인과의 소담스러운 대화를 좋아한다.

멀리서 스산한 바람이 나뭇잎들과 춤추는 소리,

그 나무 밑에서 의도 없는 하모니를 만드는 가을밤벌레소리를 좋아한다.


텅 비어버린 이 강바닥에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우며 살겠다.

그냥,

내 배를 굶주리지 않을 정도만 벌어먹으며

마치, 미래의 내가 삶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하루로

오늘을 택해 과거로 돌아온 것처럼.

매일매일매일

맹목의 강이 다시는 차오르지 못하도록

이 강바닥을 '나'로 채우며 살겠다.

나에 대한 맹목의 강을 만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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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끝에 다다른 언젠가.

물어볼 것이다.

'나'에 대한 맹목의 강은

그 값어치가 얼마나 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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