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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석 May 10. 2021

고통이 우리를 부를 때

전직 기자미국 병원 채플린 생존기

죽은 아이에게 세례를 베푼다?


2017년 1월, 오하이오 주립대학 병원 야간 당직 때 일입니다. 당직 때마다 항상 기도하는 일은 제발 어린이 병동에서 연락이 오지 않게 해 달라는 겁니다. 이상하게도 신생아 중환자실은 지금도 그렇지만 레지던트 시절에는 더욱 기피지역이었습니다. 정말 작고 귀여운 생명체들이 호흡기계와 기도 삽입관 등 여러 가지 의료기구에 의지해 인큐베이터나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은 그것 자체로 보기 힘든 모습입니다. 특히 ‘왜 이런 아기들이 고통을 받아야 할까’ 생각하면 더 마음이 저려옵니다. 그날도 기도를 드리고 병원 당직실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한 밤중에 삐삐가 울렸습니다. 신생아가 죽었는데 부모들이 세례를 원한다고 그러는 겁니다. 당시 저는 미국 장로교회 목사로 갓 안수를 받아서 성례를 수행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생아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죽은 아기에게 세례를 베푸는 일이었습니다. 순간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하는 생각에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한 번도 세례를 집례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례 집례 성구집 (친한 목사님이 안수 선물로 주신 것)은 비상용으로 가지로 있었지만, 교회 세례식도 아니고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일단 환자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지금 당장 세례를 달라는 것은 아니고 다음 날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작은 이별 예식을 부탁한다는 취지였습니다. 일단 가슴을 쓸어내리고 산모와 남편을 위로한 뒤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밤새 고민하고 기도하고 물어보고 연구를 했습니다. 두 가지였습니다. 환자가 요구하면 할 수 있으면 다 들어준다는 쪽과 혹시 교리나 양심에 걸림이 있으면 안 해도 된다라는 쪽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저는 ‘죽은 아기에게 세례가 무슨 의미가 있나’라는 교리적 생각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식을 원하면 일종의 정결 예식 같은 형식으로 가족들을 위로하는 전례로 인도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이 다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아침 다시 병실로 가 문을 열었습니다. 비교적 큰 병실에 산모가 누워있고 그 곁에 작은 투명 플라스틱 꽃바구니에 예쁜 드레스를 입은 인형 같은 것이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다가가서 보니 인형이 아니었습니다. 입 주위가 파란 건지 까만 건지 구분이 되진 않았지만 이목구비가 또렷한 한 아기가 누워있습니다. 전날 죽은 신생아였습니다. 순간 가슴이 내려앉았습니다. 환자의 가족 20여 명이 둘러 서서 여기저기서 훌쩍이고 있었습니다. 순간 온몸이 얼어붙어서 어떻게 무슨 말로 예식을 시작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눈을 감고 코로부터 호흡을 시작해 깊이 들여 마시고 천천히 입으로 내쉬자 조금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준비한 예식서를 나눠주고 이렇게 첫마디를 땠습니다. “어떻게 위로를 드려야 할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많이 아프네요.” 그리고, 그 아기를 바라보았습니다. 핑크 빛 머리띠를 하고 반듯하게 누워있습니다. 순간 세례를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성부자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기의 이름을 부르며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물세례는 이 아기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여기에 모인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신 분들은 그 세례의 의미를 다시 새겨 보시면 좋겠습니다. 하늘의 위로가 산모와 가족 분들께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그리고 간단히 기도하고 예식을 마쳤습니다. 목사로 안수받고 처음 집례 한 세례식이었습니다. 형식에도 어긋하고 제가 알고 있는 교리에도 맞지 않았지만, 병실을 나서는 제 마음속은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충만함과 평안함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 일이 있은 뒤 처음 맞이 한 원목 세미나 시간에 우연히 목사 안수를 받지 않은 채플린이 세례와 성찬을 베풀 수 있느냐는 문제로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대체로 두 갈래로 의견이 나뉘었습니다. 보수적인 교단 출신 목사님들은 반대 입장이었고, 나머지는 환자와 가족들을 위로하는 차원에는 개인적 판단에 따라 가능하다는 쪽이었습니다. 양쪽 다 의미 있는 의견이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다 맞는 말 같아서 머뭇거리다가 제 이야기를 그냥 나눴습니다. 그랬더니, 토론 내내 침묵으로 일관하던 불교신자인 50 대 간호사 출신 채플린이 용기를 얻은 듯 그녀의 체험을 나눠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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