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애도를 위하여
병원에서 여러 가지 위기의 상황을 봅니다. 특히, 환자와 가족들은 아이들이 갑자기 죽거나,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조차 치료를 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절망합니다. 많은 경우 곁에서 이들을 돕는 의사나 간호사들도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힘들어합니다. 중환자실에서 만난 한 초임 간호사가 저에게 "환자가 갑자기 울며 이제 다 죽게 되었다고 할 때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며 조언을 구합니다.
사실 사람마다 상황이 다르고,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소식에 반응하는 방식도 모두 다르기 때문에 뭐라고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지만, 제가 대처하는 방법 몇 가지를 소개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1. 함께 곁을 지켜주기
조언을 해 달라고 한 중환자실 간호사는 자신이 슬픔에 빠진 환자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것(sense of helplessness)에 대해 가슴 아파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뭔가 눈에 보이는 것을 해 주어야 도와준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 간호사도 제게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간호사님, 뭘 해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그 곁을 지켜 주셨잖아요?"
많은 경우에 우리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처럼 무엇을 해야만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재난을 당한 사람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 잘 곳을 제공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큰 슬픔으로 자기 자신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슬픔을 잘 표현할 수 있도록 안전한 환경을 마련해 주는 일입니다.
누구도 화산처럼 폭발하는 슬픔을 단숨에 잠재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4살짜리 아이가 할머니 집 수영장에 빠져 죽었는데, 숨진 아이를 보며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부모나 그 할머니에게 말로서 어떤 위로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그들이 충분히 슬퍼할 수 있도록 안전한 공간과 시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 우선입니다. 물과 휴지도 필수적입니다. 이 순간에는 어떤 말보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타인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애도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병원 채플린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말이 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자신이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지 마라. 환자나 그 가족들은 위기에 순간에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누가 거기에 있었는지는 기억한다"라고 말입니다.
2. 슬픔을 충분히 느끼게 하기
슬픔이 폭발한 순간에 많은 의료진들이 하는 실수 중에 하나가 마치 불을 끄려는 소방관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실 큰 불 앞에서는 소방관들도 섣부르게 달려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환자나 가족들이 슬퍼할 때 곁에 있는 사람들이 종종 '괜찮아질 거다,' '희망이 어디엔가 있을 거다' 라며 울음을 자제시키려고 합니다.
물론, 병원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자제를 유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환자나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환자나 가족들은 슬퍼할 권리가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적당한 장소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입니다. 또한, 이런 슬픔과 애도의 과정이 있어야 이후에 건강한 회복이 뒷따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상대방의 슬픔이나 다른 감정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조금 특별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칼 로저스는 이것을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 Unconditional Positive Regard, UPR"이라고 불렀습니다. 돌봄의 대상을 나보다 낮은 존재가 아닌 수평적인 관계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감정과 이성을 가진 같은 인간으로 인정하고 돌봄 대상의 자기 결정과 판단을 존중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저는 이런 태도가 공감을 표현하는데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적으로 죽음이나 눈물은 금기시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사회문화적 배경은 미국 사회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죽음을 이야기하거나 눈물을 보이는 일이 많은 경우 믿음이 없거나 용기가 없는 사람으로 보일까 두려워 합니다. 이런 정죄나 판단에 익숙한 돌봄의 대상에게 아무것도 정죄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겠다고 작정하며 함께 곁을 지키겠다는 마음이야말로 애도자로 하여금 마음 편하게 슬픔을 표현하게 하는 좋은 안내자라고 생각합니다.
3. 새로운 길 찾기
병원에서 만나는 환자들 대부분이 완쾌되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길 원합니다. 하지만, 가족을 병으로 잃은 분들은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녀, 부모님 혹은 친구가 더 이상 자신과 함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슬픔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기억에서 조금 희미해질 수는 있지만, 의식이 있는 한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새로운 삶의 의미와 방식을 찾는 일이 애도 과정의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많은 환자들이 슬픔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거나, 연명치료에 매달리다 중요한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현대 의학기술의 발전으로 병을 치료하지는 못하더라도 생명현상을 유지하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혈압이 떨어지면 약물로 정상혈압을 유지할 수 있게하고, 폐속에 산소를 불어 넣어 호흡을 유지할 수 있도 할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이런 장치들이 정말로 생명을 연장시키는 일인지 아니면 죽음의 과정만을 연장시키는 일인지 가늠하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때때로, 종교적인 이유로 의료진의 다소 애매한 판단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말기 암 환자들의 경우, 병원에서 치료를 어렵지만, 처치는 가능하다는 말 (not curable, but treatable)을 의사들이 많이 합니다. 정말 50 대 50일 가능성도 있지만, 많은 경우 이런 진단을 받으면 6개월에서 1년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환자 가족들은 희망적으로 해석합니다. 믿음과 주변의 격려를 통해 고된 화학치료를 받으며 연명치료 아닌 연명치료를 받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은 줄어들고 지치고 힘든 날과 좋아지는 날을 반복하다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가족들과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 분들은 나름의 의미를 찾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병마와 싸우고 싸우다가 지쳐서 갑자기 돌아가시는 분들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인생의 의미를 생각할 여유도 없이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는 참담한 현실을 봅니다. 살아 있을 때, 의식이 조금이라도 있을 때 삶에 대해, 가족에 대해, 인생에 대해 정리하는 시간을 꼭 가지는 것이 떠나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남아서 그 슬픔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삶의 길을 찾게 하는 소중한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도 2018년 2월부터 연명치료를 미리 거부하는 서약서 (Advanced Directive)가 시행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스스로 죽음을 차분하게 준비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특히, 가족들에게만 이런 결정의 부담을 주지 않고 병원에서도 돌봄 차원의 정보 제공과 컨설팅이 실질적으로 이뤄지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