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대학원과 학원일을 병행한다는 것을 들으면 의아해한다. 아무리 가업이라지만 그렇게 시간과 노력을 들여 수업을 해야만 하느냐고 말이다. 조금 더 오래 알고 지내면 옴짝달싹 할 수 없는 나의 교착 상태를 이해해주기도 한다. 엄마가 학원을 계속하지 않으면 매달 일정 금액의 고정 지출을 조달할 방법이 없고, 그러나 엄마의 몸은 조금씩 고장 나고 있고, 그럴 리 없지만 정말 운이 나쁘면 지금까지 해온 공부를 접고 경제전선에 뛰어들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나의 몇 걸음 앞선 걱정들과 구구절절 말하자니 입이 아픈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을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두고 나는 그다음 문장을 어떻게 쓸 것인지 잠깐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있다. 그래서 그런 상황을 만든 누군가가 밉다.
이러한 상황이 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뒤로하고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을 산다.
이러한 상황이 있다. 일단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해본다.
예전에는 이 시기가 지나면 좀 편해지겠지 기대했지만, 지금은 살다 보면 해야만 하는, 해결해야 하는 일들은 계속 생기기 마련임을,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을 지금 하지 않으면 나중에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건 앞으로의 삶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체념의 상태라기보다는, 삶은 본디 복잡하고 어지럽고,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달콤함을 원 없이 즐길 수는 없더라도 맛보는 정도는 가능하다는 나름대로의 요령을 터득한 것이라고 포장해보는 것이다.
나는 이십 대의 대부분을 징징이와 울보, 슬픔이의 상태로 보냈다. 요즘은 자유로움에 대해 생각한다. 고민과 의무, 욕망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그것들을 마음에 담고도 의연할 수 있는 그런 자유로움을 가지고 싶다. 그래서 나의 삶을 실컷 복잡하게 만들고 싶다. 힘이 닿는 데까지 학원일을 하고, 시간을 내어 할머니를 보러 가고, 외국에서 포닥 과정을 밟고, 순한 아이와 떼쓰는 아이를 낳고, 쩔어주는 논문을 쓰고, 계속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이런저런 글들도 꾸준히 쓰고 싶다. 그런 과잉의 상태에서도 남을 미워하거나 탓하지 않고, 옆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자유를 가지고 싶다.
혼자 방에 틀어박혀 울 수도 있지만, 밖에 나와 함께 웃는 것이 대체로 조금 더 나았던 것 같다. 숨을 쉬고, 밥을 든든히 먹고, 옆 사람을 보아야겠다. 그러면 지끈거리던 머리도 조금 맑아지고, 밀려오던 짜증도 누그러진다. 긴 가뭄을 적시는 비와 찹찹한 공기가 느껴지고, 거기에 딱 맞는 노래가 남자 친구가 사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고, 군말 없이 사흘 내내 고된 실험을 도와준 연구실 사람들, 부르면 와준다는 친구들, 시험 보강을 도와주려고 제주에서 올라온 동생이 있음을 알게 된다. 나에게 필요한 것들은 다 여기에 있으니까, 남은 오늘 논문을 몇 줄 더 써서, 내일은 졸업과 자유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