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셈법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읽고

by 콩밥

내 손가락은 주기적으로 수난을 당했다. 중요한 시험이 다가오거나, 예상치 못한 타인의 분노를 맞닥뜨렸을 때, 불현듯 '이렇게 살다가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떠오를때, 그럴 때마다 손톱 옆의 살들이 뜯겨 나갔다. 사소한 불안은 손을 뜯는 정도로 해소하면 그만이었지만 어떤 불안은 극단으로 치닫아 일상을 망가뜨리기도 했다.


나에게 극도의 불안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엄마의 화, 그것 외에는 없었다. 엄마는 굉장히 사소한 부분에서 화를 내기 시작했는데, 그 분노는 절정에 달해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기 전까지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조금 살만해 졌다 싶으면 꼭 한 번씩 마찰이 생겼다. 나는 그럴 때마다 어찌할 줄을 모르고 벌벌 떨었고 스스로를 책망하며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했다. 눈가의 모세 혈관이 터지도록 울거나 의미 없는 동영상으로 하루를 소진해버렸다. 가끔은 나에게 벌어진 상황을 납득하거나 순응하게 될 때까지 글을 썼다.


그러나 아무리 글을 써봐도 나의 비정상적인 불안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엄마의 분노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명확해지기는 커녕 더욱 복잡해지기만 했다. 엄마와 관련된 문제는 우리 둘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 상황 탓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빠는 잦은 해외 훈련과 전근으로 인해 거의 우리 곁에 없었고, 엄마는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쉼없이 일했다. 엄마는 아빠의 진급을 위해 각종 회식과 접대 자리에 참석했지만, 아빠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불합리한 일들로부터 엄마를 지키지 않았다. 거기에 친가와 외가 친척들도 엄마에게 어떻게든 경제적인 문제를 떠넘기려 했다.


고작 한 문장으로 평가해버리기에는 다소 건방진 부분이 있지만, 엄마는 외가에서도, 아빠와도, 가족이라는 정원을 그럴듯하게 가꾸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니 나와 동생으로부터 어떤 의미를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런 지리멸렬한 상태는 엄마의 문제이지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좀스러운 가족 문제에서 벗어나 넓은 세상과 연결되기를 갈망했다. 정확히는 가족의 사랑과 지원이 없어도 될 정도로 입신하거나, 돈과 관련된 문제를 한방에 처리해줄 수 있을만큼 성공해버리고 싶었다. 재미있게도 내가 그런 마음을 먹고 전화를 소홀히 하거나, 우리 가족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좀 덜 희생하려고 하거나, 혹은 이러한 상황을 경멸하는 속내를 조금이라도 드러내면, 엄마는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그러면 내가 잘못을 실토하고 반성할때까지 나에게 아버지를 닮아 이기적이라든지, 내가 당신을 무시한다는 둥의 송곳같은 말들을 쏟아냈다.


나는 엄마와 나머지 것들 사이의 균형을 잡기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종종 터져나오는 엄마의 울화와 함께 주기적으로 깊은 불안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화를 낼 조짐이 보인다거나, 조금이라도 엄마의 심기를 거스를 것 같은 상황이 되면 안절부절 못하고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했다. 엄마가 왜 화를 내는지도 어느 정도 알겠고 그게 다 내 탓만은 아니라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음에도 왜 이렇게 불안한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만나게 된 책이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었다.


<불안>은 불안의 원인과 해결책을 다루고 있다. 책에 따르면 사람들에게는 어린 시절에만 누릴 수 있었던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결핍이 있다. 그리고 연인으로부터 낭만적인 사랑을 갈구할 뿐만 아니라, 세상으로부터도 타인의 배려와 존중, 중요한 사람이라는 느낌, 따뜻한 환영과 같은 사랑을 받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만약 사람들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지 않고 지위와 능력을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그리고 부와 신분에 따라 우리를 홀대한다면, 슬픔과 무력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런데 신분이 고정되어 있던 시절에는 문학, 예술, 종교로부터 가난이나 낮은 지위가 자신의 결함에 의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빈자들이 귀족보다 고귀하고 사회에서 쓸모가 크다는 메세지와 위로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게 되면서, 사람들은 부와 지위가 개인의 능력과 도덕성, 성실함에 따라 공평하게 획득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재능이라는 것은 변덕스럽기 그지없고, 성공에는 약간의 운도 필요하며, 직업과 소득은 내가 속한 기업, 세계 경제 따위의 불확실한 것에 의해서도 쉽게 흔들릴 수 있다. 그러니 요즘 사람들은 불안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알랭 드 보통은 세상 사람들의 조건적인 관심으로 유발되는 불안을 누그러뜨릴 몇 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예를 들어 불특정 다수의 조롱과 모욕은 '철학'으로 해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어떤 이성적 판단 과정을 거쳐 받아들임으로써 불필요한 불안을 방지할 수 있다. 혹은 높은 지위란 무엇인가를 다시 정의하기 위해 '정치'를 이용해 투쟁할 수도 있다. 또는 삶의 덧없음이나 폐허, 거대한 자연을 다루고 있는 '예술'을 통해서도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주류를 왕따시키고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과 공동체를 꾸리는 '보헤미안' 정신으로 일관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말처럼 사람들의 변덕스럽고 속물적인, 종종은 냉담한 시선을 이겨낼 수 있다면, 세상 사람들의 호의와 관심, 명성과 인기라는 것은 참으로 덧없는 것이며, 오히려 삶에서 중요한 것은 가까운 사람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지가 아닌가 싶어졌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불안해했던 것은 누구보다 가까운 사람, 엄마의 사랑이 언제든 끊길 수 있는 것이며, 어떤 조건을 충족해야만 획득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음을 깨달았다. 엄마에게 꽃을 보내고, 생활비를 보태고, 학원 일을 도운 것은 정말 엄마를 걱정해서, 엄마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기 보다는, 엄마에 대한 나의 사랑을 증명하고, 나의 쓸모를 확인시켜주어야 한다는 마음의 비중이 더 컸다. 그러고는 엄마라면 내가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나에게 사랑을 주는 존재여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미묘하게 억울해했다. 내가 가족으로부터 도망치려 했던 것도 가족의 사랑조차 조건적인 것이라면 차라리 받지 않으리라는 반항심의 일종이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엄마를 한번도 제대로 사랑해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자란 어른 사이에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것이 애당초 가능한 것이긴 할까. 생각해보니 죽고 못사는 남자친구에게 내가 무조건적인 사랑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 그는 이미 나만의 여러 조건들을 통과했다. 나는 그와 대화가 잘 통하는지, 그가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친구들과 대화할 때 욕을 많이 쓰지는 않는지, 나의 배려를 당연하게 여기지는 않는지, 성실한지, 술과 담배를 하는지 유심히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부모님 노후는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 있는지, 가족들은 화목한지, 연락은 잘 되는지, 표현은 잘하는지도 은연 중에 따져보았다. 그러니까 나는 안전하고 배신당할 염려가 없다는 셈을 마친 후에야 조건부의 무조건적 사랑을 행하기로 결심한 것이고, 내가 그에게 보내고 있는 무한한 지지도 그의 그러한 성품을 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제야 엄마의 수많은 단서 조항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네가 내 딸이라면, 적어도 같이 밥을 먹으면서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이야기를 나누어야하는 것이 아니냐, 엄마가 이렇게 아프면 먼저 학원 일을 돕겠다고 말해야하는 것이 아니냐, 고작 집안일 한 걸로 생색을 내면 안되는 것 아니냐, 같은 말들은 요구가 아니었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너를 딸로 생각하지 않겠다는 협박 같은 것이 아니었다. 당신은 이미 충분히 헌신하고 있었고 나에게 관심을 쏟고 있었는데, 그에 비해 내가 너무 차갑기 때문에 슬프고 힘들다는 의미였다. 나에게 엄마가 무조건적인 사랑을 기대할 수 있는 존재인 것처럼, 엄마에게 나도 그런 존재였을 터였다. 아마도 나는 엄마의 기준에서 수백번은 배신을 했을 것이다. 당신을 지지해야하는 몇 안되는 사람의 냉랭함이 세상에 혼자인 것만 같은 무력감과 불안을 야기했을 것이고, 그것이 울화로 터져나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 나는 느리지만 조금씩,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는걸까'에서 '내가 당신을 신경쓰고 걱정하고 있습니다'의 수준까지로 발전했다. '이렇게 많은 지원을 받으면 언젠가는 돌려줘야 하니 받고싶지 않습니다'에서 '나의 안전지대가 되어주어서 고맙습니다'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동안 먼길을 돌아왔다. 엄마의 사랑의 방식이 항상 옳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나를, 그 당시의 상황을, 다른 사람을 탓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아마 예전 같았으면 나는 왜 이렇게 꼬인 사람이었을까 하고 연필을 잡고 분석하려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감사함의 상태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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