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2014)

‘변종 소시민’을 만들어내는 사회에 관하여

by 유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러닝타임 가운데 정확히 중간 지점에서 잠시 쉬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로지 나의 정신건강을 위함이었으리라. 나는 영화가 가진 힘에 압도되어 버렸고 그렇게 경직된 체 거의 반강제적으로 영화를 관람했다. 어쩌면 ‘관람’이라기보다는 ‘고문’이었을지도. 그렇다면 그 힘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단숨에 이야기를 진전시키는 편집도, 역동적인 카메라도, 수남(이정현 분)의 경이로운 연기도 아닌 ‘현실’의 힘이 나를 꼼짝 못 하게 만든 것이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속 현실이 과장되어 보이는가? 9만 2개월을 꼬박 일해야 집을 살 수 있고, 자격증을 12개 따도 공장의 좁은 사무실에서 기계처럼 일해야만 하며 겨우 맞춘 의료기기의 부작용 때문에 손가락이 잘려나가야만 하는 영화 속 현실은 ‘과장’이라기 보단 ‘재현’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은 어딘가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나도 이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두려움이다. 분명 현대인들은 성실해야 한다는 강박과 자기 착취의 연속인 삶을 살고 있다. 수남처럼 끊임없는 노동을 통해 현실의 불안정과 불안감을 달래거나 ‘스펙 쌓기’의 지적 노동을 통해 미래의 불안함을 해소해야만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9만 2개월’의 벽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재에서 우리는 끊임없는 자기계발과 노동을 강요받는다. ‘정당한 경쟁과 이를 통한 자본의 취득’이라는, 그야말로 ‘정의로운’ 사회구조는 그다지 정의롭지 못해 보인다. 공교육마저 신자유주의적 경쟁요소 중 하나로 편입된 현실에서, 수남이 선택한 고등교육은 흔히 말하는 ‘자사고’, ‘인문고’ 등과는 거리가 먼 취업을 위한 고등학교였다. 태생적으로 열등한 지위를 부여받은 수남은 ‘정당한 경쟁’을 펼칠 기회조차 박탈당한 체, 아무리 노력해도 겨우 공장의 말단 사무직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구조는 결국 수남을 ‘변종 소시민’으로 만들었다. 지각없이 휘두르는 그녀의 폭력은 사회에 관한 분노와 체념을 기저에 깔고 있다. 이는 이 영화가 다소 과장되어 보이는 지점과 일치하는데, ‘피의 복수’라는 장르적 쾌감이 카타르시스로 이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남이 복수하는 인물들도 결국 소시민들, 사회 구조 속에서 각자 다른 양상으로 희생당하는 인물들이다. 전역한 원사, 통장, 세탁소 사장 등은 수남과 마찬가지로 사회가 빚어낸 변종 소시민의 단면이며, 무능한 경찰들 또한 그녀에게 희생당할 명분이 전혀 없다. 이는 수남의 분노가 명확한 방향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사회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을 찾을 수 없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이 세계는 너무나 복잡하고 답답하다. 통쾌하지만 동시에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그녀의 분노를 보고 있노라면 현실의 부조리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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