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

by 므므무

"지금부터 눈을 감고 제 목소리에만 집중해주세요."


나는 그녀의 지시에 따라 눈을 감았다. 그녀의 낮은 목소리는 묘한 긴장감과 설렘을 불러일으켰다. 일주일 전 친구의 소개로 만난 그녀는 최근 최면을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에게 관심이 있던 나는 급하게 최면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했고, 그녀는 반가워하며 한번 경험해보겠냐고 제의했다. 나는 최면보다는 그녀가 궁금한 마음에 덜컥 좋다고 승낙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는 일을 반복할 거예요. 자, 숨을 들이마시고..."


나는 가슴을 살짝 들어 올리며 폐를 팽창시켰다. 숨이 이미 가득 찼지만 생각보다 그녀의 '들이마시고'는 길게 늘어졌다. 나는 숨을 참는 기분으로 그녀의 '내쉬세요'를 기다렸다.


"내쉬세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는 개운한 기분으로 폐 속 공기들을 내뱉었다. 가슴이 천천히 내려앉는 느낌은 썩 기꺼웠다. 그녀는 그 뒤로도 몇 번이고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행동을 지시했다. 그녀의 지시가 반복될수록 숨쉬기 속도가 그녀의 속도에 점차 맞아 들어갔다. 나는 속도가 맞았을 때 느껴지는 쾌감에 살풋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호흡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하니 살짝 정신이 아득해졌다.


"몸의 힘이 점차 빠집니다. 아주, 아주 편안한 상태가 되실 거예요."


나는 그녀의 말에 맞추어 몸을 축 늘어뜨렸다. 그녀의 지시를 따르는 일이 생각보다 재밌었다. 나는 그녀의 다음 지시가 무엇일지 기대하며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끊임없이 나를 낮고 아늑하고 편안한 상태로 이끌었다. 나는 신체에 그 어떤 기운도 남기지 않고 모두 빼내려고 노력했다. 힘이 사라질수록 그녀의 목소리가 더욱 선명해졌다.


"이제부터 제가 손가락을 튕기면, 아주 평화로운 숲으로 갈 거예요. 그 숲은 초록빛 풀들이 넓게 펼쳐져 있고, 높고 단단한 나무들이 자리 잡고 있죠."


그녀는 어느 숲에 대해 설명하더니 몇 번이고 그곳으로 갈 것이라며 준비하라고 했다. 나도 모르게 그 숲에 가고 싶은 마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타이밍에 맞게 그녀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녀가 설명해준 그 숲에 누워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눈을 뜨면 정말 울창한 나무들과 푸른 식물들이 가득할 것만 같았다. 최면을 완전히 믿지 않는 나에게는 숲이 정말 눈앞에 펼쳐지는 일은 아직 없는 듯했다.


"편안한 숲을 천천히 느껴보세요. 안전하고, 평화로운 곳이에요."


그녀는 숲의 평화와 안전을 반복해서 읊었다. 반복되는 지시에 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차츰 흥미를 잃어갔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와 상관없이 내가 눈을 뜨면 보일 숲에 대해 상상했다. 거대한 나무들, 그 아래를 비집고 올라오는 푸른 싹들, 줄기와 이파리들, 그 모든 것의 뿌리를 감싸 안은 흙. 나는 보드라운 흙을 밟으며 거친 나무 결을 손으로 훑고 싶었다. 풀에 코를 가져다 대고 숨을 크게 들이키며 숲의 향을 폐에 머금고 싶었다.


"자, 이제 다시 돌아올 시간이에요."


스쳐 지나가듯 들리던 그녀의 목소리가 귀를 꿰뚫었다. 나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 앞에서 깨어나기 싫다며 어리광을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당장 일어나라고 하기 전까지는 아직 몇 초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상상 속을 돌아보는 내 귓가에서 그녀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조금만 더 내가 그녀의 최면을 믿었다면, 지금 이 순간 정말 숲의 흙을 밟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카운트다운이 더욱 아깝게 느껴졌다.


"자, 이제 눈을 뜨세요."


아무 준비 없이 널브러져 있던 나는 급하게 눈을 번쩍 떴다. 억지로 올려지는 눈꺼풀 사이로 푸른 숲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눈을 한번 깜박이자 노란 벽지가 눈에 들어왔다. 급격한 환경의 변화에 나는 숨을 헐떡였다. 검은 상상과 하얀 현실 사이에서 본 초록빛이 잊히지 않았다. 검은 나무들 뒤로 푸른 식물들, 푸른 식물들 뒤로 하얀빛. 쏟아지는 어지러움에 눈을 수차례 깜빡이자 그녀가 시야에 들어왔다. 동시에 걱정하는 그녀의 낮은 목소리가 두 귀를 감싸 왔다.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나는 그녀의 눈에서 좀 전에 목격했던 그 푸른 숲을 발견했다. 깨달았을 땐 이미 그 숲과 사랑에 빠지고 만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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