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식이었다. K는 캠퍼스 본관 앞 벤치에 앉아 프리지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아닌 여러 졸업생들은 그들의 가족과 함께 주위를 거닐며, 나름의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어댔다. 남색의 학위복들은 설레는 벨벳의 파동을 만들어내었다. K는 파동이 전하는 출렁임에 어지러움을 느끼며 멍하니 본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K가 4년간 아르바이트해 벌어들인 등록금은 낡은 본관 건물에 페인트칠 하나 새로 하지 못했다. 그녀는 본관이 앞으로도 몇 년간 바뀔 일이 없다는 사실에 안심하면서도 아쉬웠다.
K의 대학생활은 잔잔했다. 새내기 때는 OT, MT 등 갈 수 있는 술자리는 다 참석했지만, 그 흔한 동기 친구 하나 제대로 사귀지 못했다. 세네 번 어색하고 낯선 분위기의 술자리가 반복되자, K는 점점 지쳐갔고 반대로 다른 동기들은 열심히 무리들을 만들어갔다. K는 곧 그 어떤 모임에도 얼굴을 들이밀지 않았고, 그 흔한 동아리나 학회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그 어떤 술집보다도 학교 도서관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다. K는 그 사실이 딱히 슬프지도 않았고, 오히려 거의 만점에 가까운 학점에 만족스러웠다.
K가 취업 박람회나 스터디 등에 참여할 때면 가끔 낯선 이들이 그녀의 대학생활에 대해 물어봤다. K는 솔직하게 수업 외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낸다며, 그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답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K가 안타까웠는지 상냥한 말투로 '그럴 수도 있지'라며 이해하는 척했다. K는 공부하기 위해 온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한다는 사실이 왜 안쓰러운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대학생 전까지는 하루 종일 공부하기만을 바랐으면서, 대학생이 무슨 다른 생명체라도 된 듯 놀기를 바랐다. 정확히 말하면 놀면서도, 좋은 학점과 많은 스펙을 쌓기를 바랐다. 그 모든 일을 전부 잘 해내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경험'이었다.
K는 학위복의 물결 속에서 새내기 때 얼핏 본 듯한 동기의 얼굴을 발견했다. 그 동기 역시 다른 동기들과 인사하기보다는 그녀의 가족들과 조용히 사진만 찍고 있었다. 친구가 없는 K조차 1학년 때 그 동기에 대한 소문을 지나가듯 들은 적이 있었다. 신입생이 과 선배 두 명에게 양다리를 걸쳤는데 알고 보니 동성애자였다는 이야기였다. 너도나도 소문을 실어 나른 만큼 자극적인 주제와 내용이었다. 처음 소문을 들었을 때 K는 동성애자가 왜 굳이 이성 선배들에게 양다리를 걸쳤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녀의 질문을 들은 다른 동기들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라며 소문과 딱히 관련 없어 보이는 동기의 행동거지에 대한 비난을 이어갔다. K는 딱히 정의로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논리적인 추론도 아닌 감정적인 욕설들에 피곤해져 자리를 피해버렸다.
K는 사진을 찍는 동기의 미소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그 동기의 부모님이 아파트 두 채를 지니고 있다는 소문도 떠올렸다. 그녀는 조금은 다른 동기들이 그 동기를 미워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 역시 동기에게 조금은 질투와 부러움을 느꼈다. K의 부모님은 이 땅에 지어진 아파트들의 수많은 방들 중 살 수 있는 곳이 없어 전세만 전전하고 계셨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집들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최고 권력자가 되어버린 세상이었다. K는 아파트의 벌집 같은 모양새를 머릿속에 그려보다 주위의 학생들을 돌아보았다. 이 학생들은 곧 성실한 벌이 되어 좋은 아파트에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꿀을 꿔다 모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처음부터 꿀을 한 아름 갖고 태어났거나, 운 좋게 꿀단지가 당첨된 사람만이 아파트에 들어갈 만큼의 꿀을 모을 수 있다. 애초에 주인이 정해져 있는 벌집이었다.
캠퍼스 가장자리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K의 폰도 오토바이 엔진처럼 부르릉하고 진동 소리를 냈다. K가 폰을 들고 전화를 받자, 학교 정문 앞이라는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K는 벤치에서 일어나 오토바이 소리가 울렸던 방향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새빨간 오토바이 옆에는 헬멧을 쓴 청년이 노란 프리지아 꽃다발을 들고 부끄러운 듯 고개 숙이고 있었다. K는 청년에게 다가가 입꼬리를 올리며 꽃다발을 받아 들고는 체크카드를 건넸다. 청년은 카드를 긁고 영수증을 뽑아 건네더니, 다시 오토바이를 운전해 빠르게 학교를 빠져나갔다. K는 오토바이가 남기고 간 매연 속에서 프리지아 향기를 찾기 위해 꽃다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졸업 날 K는 노란 프리지아 꽃다발을 받고 싶었다. 프리지아는 '새로운 시작', '당신의 앞날'이라는 꽃말 덕분에 졸업식을 대표하는 꽃이 되어버렸는데, 사실 K는 프리지어의 또 다른 꽃말이 더 좋았다. 그녀는 꽃다발을 가슴에 끌어안고 몸을 돌려 학교 본관 앞으로 향했다. 홀로 대학교로 꽃배달을 시킨 졸업생에 대한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저 시선들은 그녀가 여전히 취준생이고 높은 학점 외에 해놓은 활동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들으면 아마 훨씬 더 우울한 분위기를 뿜어낼 것이다.
본관 앞에 도착한 K는 몸을 돌려 폰을 들었다. 셀카로 돌려진 작은 화면 안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었다. 낡은 캠퍼스 본관과 노란 프리지아, 그리고 그 앞에 환하게 웃는 K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새하얀 치아가 보이게끔 최대한 밝게 웃으며 촬영 버튼을 터치했다. 세네 번 사진을 찍은 뒤, K는 꽃다발을 묶고 있던 리본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분홍빛 포장지를 천천히 벗겨내자 노란 프리지아의 초록빛 줄기들이 드러났다. K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프리지아를 머리 높이 들어 세차게 흔들다 던져버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노란 꽃잎들과 단단한 줄기들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프리지아 꽃말: 새로운 시작, 당신의 앞날, 천진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