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정신병원 (25)
두서없이 써 내려간 정신병원 경험담으로 시작한 글이 차곡차곡 쌓여서 이제 시리즈의 25번째, 마지막 글을 쓰게 되었다.
복직을 앞두고, 지난 3-4개월 간의 여정과 과거에서 소환한 기억을 마무리하려고 다시 키보드를 두드린다.
1. 싱가포르 방송국 미투 후기
한 친구가 (아마… 반 농담으로) 싱가포르 방송국은 나의 미투 사건 때문에 이제 여자를 고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득 보다 실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배경은 지난 글 ‘어쩌다 미투의 시발점’ 참고).
글쎄.
미투 사건을 마무리 지으며 회사 높으신 분들께 요구한 것이 있다.
회사 규율에 꼭 성차별/희롱에 대한 규정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당시 대부분의 기업들이 가지고 있던 sexual harassment policy 성희롱에 대한 회사 규율 자체가 없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 이후로 방송국 모든 직원이 입사 후 필수로 성평등/성희롱에 관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또한, 당시 도움을 받았던 싱가포르 여성단체 AWARE 담당자에 따르면, 내 사건이 터졌을 때, 사내 성희롱/성폭력을 리포트한 건수가 두배로 뛰었다고 한다.
용감하고 또 용감했던 23살 내가 너무 자랑스럽다.
휴식기간 동안 생긴 마음의 여유 덕분에 글을 통해 이 기억을 정리해서 드디어 마음 서재 한켠에 꽂아 놓을 수 있었다. 해방된 기분이다. 가볍다.
2. 세 달간의 병가 후기
회사의 배려로 얻은 세 달간의 병가동안 몸과 마음이 많이 치유되었다.
휴직 전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30분 걷는 것도 힘겨웠고, 유서를 쓰기까지 했다.
첫 한 달은, 거의 누워서 지냈다.
매주 병원에 겨우겨우 가서 의사 선생님 앞에서 울고 또 울었다. 다시 입원을 하고 싶었다. 세 달 동안 치료하고 쉰다고 내가 바뀔까 하는 의심과 걱정이 가득했다.
치료는 계속되었다.
병원에서 양극성 장애 진단을 받았다.
새로운 진단에 맞춰 약을 먹으니, 시도 때도 없이 요동쳤던 마음이 약간 잔잔해졌다.
마음이 차분해지니, 일렁이는 파도에 가려져있던, 하고 싶은 일들이 생각났다.
운전면허 교육을 가려고… 했다.
교육을 8번 예약하고 8번 전부 가지 못했다.
늦어서, 사진을 까먹어서, 너무 피곤해서, 집 밖에 나가기엔 마음이 무겁고 버거워서 등등. 이유는 다양했다.
미국에 있는 친구가 자기도 열 번 가까이 운전 교육을 놓쳤다고 했다. 위로가 되었다.
구몬을 시작했다.
아프기 전, 매년 가을 도쿄를 갔다.
가을의 도쿄는 완벽하다. 풍성한 은행나무와 푸른 하늘, 쌀쌀한 공기 안에서의 밤 산책. 야끼토리. 아사히 생맥주. 큰 맘먹고 나 자신에게 선물하는 우설 저녁 등등.
갈 때마다 일본어를 몰라서 답답했는데 이번 기회에 가벼운 마음으로 구몬 일본어를 시작했다.
이미 몇 주차 학습지가 밀렸지만,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것 자체가 너무 오랜만이어서 만족한다.
세계를 반바퀴 정도 돌고 왔다.
솔직히 회사원이 실직이나 출산을 하지 않는 이상 삼 개월을 쉴 기회는 거의 없다.
어릴 때부터 궁금했던 나라들로 향했다.
통장 잔고를 박박 긁어모아서 핀란드, 몽골, 마지막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여행 후기는 따로 쓸 계획이다.
며칠 전, 친구를 만났다.
무슨 얘기를 한지 기억은 안 나지만, 친구가 “수고했다”라는 말을 해줬다.
살면서 수고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지금까지 내게 ‘수고’는 ‘당연한’ 삶의 태도와 방식이었다.
무엇을 하든지 극한으로 밀어붙이고 나 자신에게 엄격하다 못해 가혹했다.
그 후유증으로… 한 삼 년 동안 누워있었고 (말 그대로, literally), 이제야 드디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정신이 들고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삶에서 나보다 한 100km는 더 나아간 것 같아서 바로 자괴감이 들었다.
하지만 정말 어두운 땅굴의 바닥을 찍고 겨우겨우 기어 올라온 나 자신이 대견하기도 하다.
다시 깊숙한 곳으로 떨어져서 자포자기할까 봐 무서운 마음도 있다.
어쨌든, 이제 죽고 싶은 마음이 없다 (다시 스페셜 땡스 투 의사 쌤…)
+ 정신병원 시리즈를 마무리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응원도 감사합니다. 다들 일은 적게, 돈은 많이, 건강하게, 행복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