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won May 19. 2016

이사는 너의 일부분을 자른다

추억의 선택권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매년 유명한 성격 유형 검사인 Myers-Briggs Type Indicator (MBTI)를 쳐봤다. 그리고 일관성 있게 나는ENTP, 즉 "the debator" (뜨거운 논쟁을 즐기는 변론가)로 분류되었다.  


E (Extroversion > Introversion)- 내향적보다는 외향적

N (Intuition > Sensing)- 감각적보다는 직감적

T (Thinking > Feeling)- 감성적보다는 이성적

P (Perception > Judgement)- 판단보다는 인식


참고로 이 웹사이트에서 무료로 MBTI 시험을 볼 수 있다.



독립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적응력과 개혁에 가치를 두는 ENTP는 행동에 있어서도 변화와 자유스러움을 추구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한 곳에

2년 이상 머무르면 왠지 답답하고 떠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마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미국-한국-미국-홍콩을 반복적으로 돌아다니고 한 학교를 2년 이상 다닌 적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하지만 3년이나 산 홍콩을 곧 떠나게 될
나는 평소와 다르게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다.


사실 사람의 감정을 이성적 vs 감성적, 이렇게 단편적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인간의 오만한 착각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복합적인 존재들이다. 예를 들어 ENTP의 내적 감성은 '소녀'이지만 지적 성숙도는 '성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마지막 기말고사를 치른 나는 뭔지 모를 기분에 사로잡힌 채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익숙한, 그리고 그렇게도 벗어나고 싶었던 도서관과 무심히 지나쳤던 복도까지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다.



매일 밤 10시에 줄을 서서 번호표를 기다리던 도서관- The University of Hong Kong


대학교의 마지막은 허무하리만치 짧았고 상상 속의 팡팡레는 들리지 않았다. 단지 1460일의 추억들이 사진을 찍는 동안 내가 지나치는 문틈 사이에 끼어서 희미하게 아른거렸을 뿐이다.


비가 오면 쪼리를 신고 조심조심 걸어갔던- The University of Hong Kong


서브웨이를 먹으면서 비둘기와 부스러기를 나누며 공생한- The University of Hong Kong


유학생들에게 학기가 끝나는 5월은 짐들과의 싸움이다.


석양이 저무는- The University of Hong Kong


짐을 정리할 때는 어쩔 수 없이 그 물건과 관련된 사람이나 상황이 머릿속에 찾아온다. 하지만 그 물건을 다 간직할 수 없기 때문에 많은 물건들은 추억들과 함께 매년 결국 흰 쓰레기봉투에 담기게 된다. 많은 추억들을 머리 속에 간직하려고 애쓰지만 인간 기억용량의 한계로 결국 짧은 시간 안에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만다.


며칠 전, 새로 터전을 잡을 싱가포르로 보낼 이삿짐을 싸던 도중, 역시나 몇 년 전부터 반복되던 선택의 순간이 왔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민트색 스타벅스 컵, 친구가 일본에서 사다준 작은 열쇠고리, 수많은 쪽지와 힘내! 노트, 색이 바랜 수건 앞에서 나는 아우슈비츠의 의사처럼 왼쪽과 오른쪽 사이에서 고민했다.


아버지가 두바이에서 사다준, 옆구리가 터진 낙타 인형 "킴"은 왼쪽으로 보내졌다. 이케아에서 산지 세 달 된 내 베개는 오른쪽으로 던져졌다.


최대한 짐을 줄여야 하기 때문에 추억까지 추려야 되는 상황은 매년 찾아왔다.

학교에서 바라본 하늘- The University of Hong Kong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물건을 버리지는 않는다.

ENTP라고 실용성만 따지지도 않는다.


"Never make someone a priority when all you are to them is an option"

(네가 어떤 사람에게 옵션일 뿐이라면 절대 그 사람을 너의 우선순위로 만들지 마라)
-Maya Angelou (마야 안젤루)


주로 나를 option보다 priority로 여기는 사람들과 관련된 물건과 편지는 조금 무겁거나 운반이 번거로워도 박스에 뽁뽁이로 돌돌 말아서까지 넣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불편한 선택의 시간은 내 삶에 간직하고 싶은 사람들을 고르는 과정으로 덤덤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나를 우선순위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항상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자의적이나 타의적으로 이별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이별은 과거의 일부분을 자른다. 만약 선택의 순간이 온다면 주도권을 가지고 박스에 넣을 기억의 뭉치들을 세심히 골라야 하지 않을까?


인생의 크기는 프리사이즈 (free-size)가 아니다.



작가의 이전글 내가 혼자 떠나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