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으로 며칠 도망을 갔다
홍콩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제일 후회하는 일 중 하나가 여행을 많이 안 가본 일이다. 홍콩은 동남아시아와 중국을 잇는 요충지로서 비교적 싼 값으로 태국, 베트남 등 휴양지를 손쉽게 갈 수 있는데 나는 여러 이유로 갈 기회를 놓쳤다.
사학년이 되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내 금쪽같은 대학 시절은 휙 지나가버리고 빌딩 숲인 홍콩은 답답하다 못해 숨을 조여왔다.
에세이를 쓰다가 삘을 받아서 무작정 타이중 (Taichung) 행 티켓을 끊었다. 타이중은 대만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다. 원래 먹거리로 유명한 타이난을 가려고 했는데 지명을 헷갈려서 타이중 행 비행기를 끊고 말았다.. (환불불가)
친한 대만 언니들이 타이중 출신이라 울며 겨자먹기로 언니들 고향 구경하는 셈 치고 비행기에 올라탔다.
혼자서.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사랑한다.
외향적이지만 일주일에 한 번은 재충전을 위해 꼭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가끔씩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나면 홀로 집으로 걸어오거나 기숙사 앞 부둣가에서 새벽 조깅을 한다. 운동광은 아니지만 아무도 없는 부둣가에서 파도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면서 뛸 때 복잡한 머리는 잠잠해진다. 혼자만의 시간은 내게 일상생활을 아무 탈 없이 이어나가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리고 혼자만의 여행은 게임으로 치면
리셋 (re-set) 버튼이다.
클릭 한방으로 캐릭터와 장소뿐만 아니라 날씨, 그리고 마주하는 고민과 사람들까지 변경된다. 정해진 시간 안에 펼쳐진 새로운 게임은 꽤 많은 장점이 있다.
1. 계획에 구애받지 않는다
나는 보통 여행 가기 하루 전에 계획을 짠다. 너무 계획을 철저하게 짜면 학교 다니듯 움직이게 돼서 느슨하게 꼭 가봐야 할 곳만 추려내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유명한 관광지보다 우연히 맞닥뜨린 사람들과 골목에 더 매력을 느낀다.
여행을 할 때는 계획대로 움직이는 학교와 직장과 최대한 정반대로 생활하려고 몸 부리 친다. 돈 주고 쉬러 왔는데 일정 때문에 초조할 필요는 없다.
2. 사건 사고는 내게 희열을 준다
사건 사고란 꼭 버스에 몸을 박는 일이 아니다. 잘못 들어선 골목부터 열차를 놓치는 실수까지, 모두 여행을 하면서 쉽게 겪는 사건 사고이다.
이번 여행 때는 gaomei wetlands라는 습지를 갔다. 타이중 끝에 있어서 가는데만 거의 두 시간 넘게 걸렸다. 택시를 타고 가려고 했지만 이십 대 초반부터 택시만 잡는 습관이 생기면 안 될 것 같아서 버스 안 인파 속에 내 몸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욕이 나오면서도 이상한 희열이 솟아올랐다.
가오 메이 습지는 나를 배반하지 않았다. 끝도 없이 펼쳐진 하늘과 땅의 흐릿한 경계선, 그리고 갑자기 튀어나왔다가 구멍으로 도망가는 꽃게들을 보다 보니 금방 시간이 흘러갔다.
예상치 못한 사고(?)는 오는 길에 생겼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버스는 포기하고 택시를 합승해야 했는데 내가 가는 방향으로 가는 일행이 하나도 없었다.
택시 아저씨들과 서서 무작정 일행을 기다렸는데 최소 구마적을 닮으신 아저씨가 hey lady! 하면서 말을 시작하셨다. 아저씨의 유창한 영어 덕분에 어느새 우린 소세지를 나눠먹으면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주변 택시 아저씨들이 모여들면서 수다판은 더 커졌고 주위 사람들은 분홍색 셔츠를 입은 여자아이와 문신 가득한 아저씨들을 불안 반 호기심 반으로 쳐다봤다.
아저씨들의 적극적인 홍보 때문에 일행도 찾아서 무사히 호텔로 복귀했다. 예상치 못한 사건 사고는 생면부지의 사람들과의 인연을 선물한다.
3. 지구 어딘가의 내 또래들을 만날 수 있다
나는 여행을 갈 때마다 그 나라에서 유명한 대학을 꼭 가본다. 그 나라의 인재들이 어디서 공부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예쁘다고 소문난 캠퍼스를 보면서 삭막한 홍콩대 캠퍼스와는 다른 매력을 느끼려고 한다.
대만에서는 대만 국립대 (National Taiwan University) 가 가장 유명하지만 타이중에서는 동해대학 (Tonghai University) 가 유명하다고 한다. 동해대학은 채플 (윗 사진 참고)과 순우유로만 만든 아이스크림과 유제품을 판매하는 상점으로 특히 유명하다.
아무튼 대학을 거닐면서 모든 것을 유심히 관찰했다. 기숙사는 어떤지, 점심 메뉴는 어떤지 등등.
미국, 그리고 아시아의 유수 대학들을 방문해보고, 청강해보고, 교환을 다녀온 결과 내린 결론은 세계 어디에서나 학생들의 삶은 거기서 거기다. 그리고 학식은 홍콩대만큼 맛없는 곳은 없다.
여담이지만 학식은 북경대가 최고다. 중국 각 지역에서 올라온 학생들을 위해 다양한 음식이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된다.
4. 숨을 쉴 수 있다
나는 여행을 가면 오히려 "덜" 차려입는 편이다. 일단 굽이 있는 신발을 신거나 치마를 입으면 걷을 때 불편하고 아무 곳이나 털썩털썩 앉는 내 습관 때문에 바지를 고집한다.
여행지에서는 나를 알 리 없는 생면부지의 사람들 덕분에 내 맘대로 살 수 있다. 화장을 안 해도 되고 바람이 들어갈 만큼 통 넓은, 그리고 엄청 편한 모시 바지나 투박한 샌들만 고집해도 코멘트하는 사람이 없다.
여행하면서 얻는 자유는 나의 숨통을 트이게 한다.
5. 친구들의 추억을 공유할 수 있다
홍콩에서 살면서 대만 사람들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구글에서 인턴을 할 때도 대만 팀 중간에 내 자리를 배정받았다. 덕분에 대만 언니 오빠들과 아직까지도 인연을 이어나가고 있다.
학교 선배인 zoe 언니와 인턴 할 때 내 앞자리에 앉은 쉐리 언니는 둘 다 타이중 출신이다. 일부러 언니들의 고향을 찾아온 것은 아니지만 막상 오니 언니들이 한 번쯤은 걸었을 거리나 학교 끝나고 군것질을 했을 버블티 집에 내 발자국을 남겼다고 생각하니 너무 신기했다.
내 존경하는 친구들, 그리고 그들을 있게 한 고향에서 그들의 눈에 비쳤을 해돋이. 맛있게 먹었을 길거리 음식 등을 공유함으로써 우리의 교집합을 더 늘릴 수 있다.
6. 나 자신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된다
당연한 이야기다. 여행지에서 오직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면서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여행을 한 번씩 다녀올 때마다 나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하나씩 알게 된다.
내가 어떤 음식을 싫어하는지부터 배 & 기차 & 차 중 멀미가 제일 빨리 오는 교통수단은 무엇인지, 일은 어떤 곳에서 하고 싶고 가족은 어떤 곳에서 꾸리고 싶은지. 처음에 막연했던 생각들은 많은 곳을 다닐수록 조금 더 윤곽이 잡혀간다.
그리고 그렇게 나도 한 조각 두 조각 완성 되어가는 중이다.
-타이중 공항에서 끄적끄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