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의 진정한 해방은, 진정으로 너희들을 사랑하는 것.
‘해방’
육아에 매여 있던 나날들, 매일같이 꿈꾸던 단어였다.
혼자이고 싶다. 잠시 사라지고 싶다. 연기가 되고 싶다.
가정이라는 틀 안에 단단히 고정된 고체에서 완전한 기체가 되어 날아가고 싶었다.
사실 그것이 진정한 ‘해방’이라고 생각했고, 그 ‘해방’은 죽어야 끝나나 보다, 이 가정을 떠나고 내 아이들이 내 곁에서 자립하여 떠나는 것만이 온전한 ‘해방’이라고-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가정을 떠날 수 없지만, 매일같이 가정을 떠나는 꿈을 꾸었다. 나는 영원히 움직일 수 없는 고체가 될 것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힌 채, 마음 한편엔 오롯이 나 혼자만의 해방을 그리며, 그렇게 셋째를 출산했다.
셋째를 품에 안던 날, 나는 처음으로 육아를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병실에 있었던 2박 3일 동안 내가 없어서 어렵고 불편했을 남편과 내가 없어서 불안할 아이들이 있는, 가정으로 내 발로 들어가고 싶었다. 우리 가족의 마지막 조각인, 이 작고 귀여운 셋째를 데리고 우리 첫째와 둘째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자. 셋째에게도 속삭였다. 너에게는 누나와 형이 있어. 아주 좋은 아이들이야. 너도 금방 좋아하게 될 거야.
셋째의 육아는 순풍에 돛을 달듯, 순항이었다.
상황이 특별히 더 나아진 것도 없는데, 아기가 유달리 순한 것도 아니었는데, 셋째에게는 무얼 우선으로 해주어야 하는지, 무엇이 덜 필요한지, 우선순위가 정확히 매겨졌던 것이다. 첫째, 둘째에게는 중구난방식으로 뭐든지 잘해주어야겠다는 마음이 앞서서 내 체력과 정신을 다 갉아먹었다면 셋째를 키우면서는 첫째, 둘째가 어린이집 가있는 시간에는 청소나 집안일을 앞서서 하기보단 같이 눈 맞추고 놀며 아기만의 귀여움을 만끽했다. 초점 맞추기, 촉감놀이 등등 인터넷에서 보던 그 시기에 꼭 해주어야 하는 일들을 가볍게 무시했다. 둘을 키우며 알게 된 노하우인 것이다. 아이들은 엄마가 너무 애쓰지 않아도 시기에 맞게 스스로 한다는 것을. ‘해주어야 한다 ‘라는 생각 대신 ’같이 있어줘야지 ‘라는 생각이 자리 잡으니 육아가 부담스럽지 않았다. 같이 누워서 뒹굴며 아기 얼굴 바라봐주고 안아주면 그만이었다.
셋째가 낮잠 자는 시간에는 같이 누워서 눈을 붙이거나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었다. 잠도 들지 않고 책도 읽기 싫은 날에는 스마트폰을 쳐다보며 뒹굴뒹굴 구르기도 했다. -첫째, 둘째 낮잠 시간 땐 무조건 일어나서 밀린 집안일이나 이유식 만들기 등, 나에게 쉼을 줄 수 있는 행위 대신 아이들을 위한 시간을 보냈다- 첫째, 둘째가 하원하면 같이 놀이터에서 놀며 첫째, 둘째의 활동도 채워주고 집에 와서는 아이들끼리 좌충우돌 싸워대는 시간 사이에 그간 쌓인 집안일 스킬로 후다닥 집안일을 해냈다. 처음으로 깨달은 것이다. 육아는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냥’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 아이가 자라는 시간을 자연스럽게 옆에서 지켜봐 주고, 지켜주는 것이 ‘육아’라는 것을.
첫째, 둘째를 연년생 터울로 낳았다. 첫째가 낯을 심하게 가리고 화장실도 못 가게 울던 엄마 껌딱지라 어린이집에 보내기가 쉽지 않았다. 최대한 내 손으로 키우고 싶은 욕심도 컸다. 첫째, 둘째에게는 이유식 단계도 한 스텝 한 스텝 모두 지켜가며 매일 공부했고 아이가 작은 이상 행동만 해도 이게 무슨 징조일까 예민하게 받아들여 같은 사례를 찾기 위해 검색 또 검색을 했다. 인터넷에서 발견한 사례들이 주었던 설루션대로 실행해 보고 되지 않으면 자책감과 조급함을 느꼈다. 내가 아이들의 심리를 불안하게 했나? 그 불안감이 아이들을 다그치는 결과가 되었고, 그 마음은 고스란히 어미로써의 자존감 하락을 불러왔다. 아이들이 잠들 때마다 오늘의 못난 나의 모습들이 영상으로 스쳐 지나갔고 그 영상들은 내면 깊숙이 스트레스로 쌓이게 되었다. 내가 자존감을 채울 곳은 육아와 집안일뿐인데 열심히 하고 또 해도 티도 안나는 집안일에, 육아도 매일 반성으로 끝나다 보니 나 자신이 바닥에 흘러 다니는 구정물만도 못하게 느껴졌다. 그 못난 스트레스는 어느 날 예상치 못한 포인트에서 남편에게 터뜨리는 악순환을 계속 겪었던 것이다.
셋째를 키우며 내가 얼마나 미숙하고 초보인 엄마였는지 뼈저리게 느꼈고, 첫째 둘째에게 더없이 미안했다. 우선순위를 모르고 헤매서 아이들을 고생시켰구나, 엄마로서 잘하고 싶은 마음만 앞서서 너희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놓쳤다.
너희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
너희들에게 나의 온 우주를 넉넉하게 내어주는 것.
그 우주 속에서 평온하게 뛰어놀 수 있게 해주는 것.
그 우선순위를 몰랐다.
발달 순서대로 해줘야 하고, 여러 놀이를 체험시켜줘야 하고, 양질의 이유식을 제공해야 하고, 늘 소독 세척해서 유해환경으로부터 지켜줘야 한다는 마음은 물론 틀리지 않지만 과하면 다 엄마의 욕심인 것을 몰랐다. 아이들은 그저 엄마가 넉넉한 품으로 안아주길 바라고, 내 눈을 보며 같이 찡긋 웃기를 바란다. 아이는 답 없는 자신의 울음과 칭얼거림에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하며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풀듯 예민하게 바라보기보단 그럴 수도 있지 무언가 불편하구나 하는 따뜻한 눈빛을 기대한다.
육아의 우선순위를 정립하는 것. -너희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 그것이 나를 육아로부터 진정한 ’ 해방’을 주었다. 육아의 우선순위 정립은 고체 같은 엄마에서 기체 같은 엄마로 변화하게 해 주었다.
* 사실 셋째를 키우며 꽤 오랫동안 첫째, 둘째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왜 셋째처럼 편안하게 바라봐주지 못했을까. 좀 더 자연스럽게 키웠더라면 아이들이 좀 더 편했을 텐데. 하지만 그때의 그 동동거림도 사랑이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를 또 다른 방식으로 질책하고 몰아가기에는 아직 육아의 길이 많이 남아 있다. 너무 작고 소중해서 이 귀한 보물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서 미숙했던 사랑을, 아이들에게 때때로 사과한다. 아이가 투명한 눈으로 “괜찮아. “ 하며 말갛게 웃어준다. 말간 웃음을 지켜주기 위해 나는 기체 같은 엄마가 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