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부러운' 삶이라는 게 존재하나요?
나는 나무를 깎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나무를 깎아서 주방 살림을 만든다.
나무를 재단하고 손질하고 다듬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 일을 시작한 이후로는 부쩍,
'부럽다' 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었다.
하고 싶은 일 하는 니가 부럽다, 나는.
불과 1년 전만해도 나는 아이 셋을 키우는 주부였다.
아이 셋을 키우며,
나 자체로의 내가 소멸되는 것이 두려워서
이런 저런 취미 생활들을 밤잠 쪼개가며 이어갔다.
잠을 못 자니 힘들었고, 고단했지만,
엄마와 아내가 아닌 '내'가 있음이 좋았고,
아이 셋을 양가 부모님의 도움없이
내 손으로 키우고자 했으니 애들 옆에서
꾸준히 할 수 있는 '일'이 필요했기 때문에
'일'로 이어갈 수 있는 '취미' 가 절실했다.
그래서 찾게 된 취미는 '우드카빙' 이었다.
목공은 거창했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들어 맞아야 하는
수학적인 일이었다면,
우드카빙은 조금 틀려도 좋고,
작고 소소하게 할 수 있는 문학적인 일이었다.
막내가 어렸고,
취미 활동을 하기도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나는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해나갔다.
그 때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대단하다' 였다.
애 키우면서 그게 되니? 정말 대단하다, 너.
얼마 전, 양동근이 피처링한 '레인보우' 라는
노랫말에서 이런 말이 있었다.
얼마 전 만난 부랄 친구들이 그래
내 인생이 부럽대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
그냥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러대
나는 아닌 것 같어? 그런 말 말어
어쩔 땐 음악 듣기 힘들어서 귀를 막아
몇 평짜리 작업실이 나를 조여오는 듯이
어 그래 딱 그 기분 같어
다른 이의 삶의 한 조각이 '부럽다' 라는 감정은
사실 우리에게 만연해 있는 감정이다.
SNS 넘어로 보이는 여유로움, 부유함...
우리는 늘 '부러운' 감정에 취해서 산다.
내가 하지 못하는 일,
나에게 없는 것,
그런 것들을 보면 우린 부러움을 느낀다.
직장에 매여서 일을 하고 있는 입장에선
하고 싶은 일로 돈을 버는 내가 부러울 수 있다.
하지만 매일매일 매출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나로써는 일정하게 일이 주어지고,
일정하게 돈이 나오는 월급쟁이들이 부럽다.
하지만 내가 월급쟁이가 된다면,
답답함도 느낄 것이고,
아이들이 아플 때마다 눈치를 봐야 할 것이고,
동료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도 생길 것이고,
아픈 아이를 등원시키며 괴로워하는 일도 생길 것이다.
아이 셋을 키우며, 내 일을 꾸려 나가려면,
잠을 포기해야 하고, 쉴 틈을 포기해야 한다.
남들 잘 시간에 일어나서 택배를 포장하거나,
상품 페이지를 단장한다.
일을 마치고 와서는 아이들 뒤치닥거리에,
밀린 집안일에 혼이 빠진다.
정말 이런 삶이 부러운 걸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단편적으로 보이는,
내 삶의 달콤한 한 조각만이 부러울 것이다.
나머지 90프로가 쓰고 고통스럽다 해도.
어떤 이의 삶도 완벽할 순 없다.
사람의 삶 속에는 희노애락이 있다.
누구도 행복하고 만족스럽게만 살 순 없는 것이다.
'부러운' 이면 뒤에는 분명히 고통이 존재하고,
그 고통을 딛고, 달콤한 한 조각에 만족하는 것이다.
하지만 '부러운' 감정에만 취해 산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달콤한 한 조각을 보지 못하고
자신에게 떨어진 고통 만을 생각하게 된다.
나는 오늘 날씬한 애엄마를 보고 고통에 빠졌다.
부럽다.
왜 나는 날씬하지 못할까.
날씬한 대신 사치스러울 걸.
그 사람이 그렇게 날씬한 몸을 유지하기까지
들인 고통에 대해서는 방관하고,
그저 날씬한 단면 만을 보고 질투하는 것이다.
날씬함이 부러우면 나도 그녀가 감당한 고통을
따라 겪고 날씬하게 가꾸면 되는 것이다.
'부럽다' 라는 감정이,
얼마나 다른 이의 공을 깎아내리고
나 스스로도 우습게 만드는 일인지
뼈저리게 체험한 하루다.
너무 창피한 감정이라 브런치에만 작게 속닥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