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 지 15년이 지나도 적응되지 않는
하지만 3년만 지내자던 제사의 기한은 무기한 연기되고 말았다. 결혼한 지 햇수로 3년이 되던 해 시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만으로 59살이니 환갑도 지내보지 못하고 가신 것이다.
원래 환자가 있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었지만, 시가에서는 예외였다. 오히려 조상님께 기도를 드리듯 제사에 공을 들였다. 하지만 설 차례를 지낸 후 보름만에 어머니는 저 세상으로 떠나셨다. 지병인 난소암의 항암치료 부작용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3년 간만 제사를 더 지내자”
얼굴도 모르던 조상님의 제사도 지낼 판에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당연히 제사를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다시 제사를 모시기 시작했다.
어머니마저 안 계시니 모든 제사의 책임과 의무는 자연스레 며느리인 나에게 돌아왔다. 제사상에 올릴 음식의 장을 보는 것부터, 제사음식과 손님치레까지 모든 일이 주어졌다. 결혼 전에 엄마가 하시는 모습을 보곤했지만 막상 내가 주도가 되어 하는 일은 정말 달랐고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제사가 많지는 않았다. 설 지난 후 보름 후인 어머니 제사와, 추석 후 한 달쯤 후인 조상합동제사 딱 두 번이었다. 설과 추석까지 합하면 통합 4번이었다. 하지만 뒤돌아서면 제사가 가까워오고 있는 느낌이었다.
여전히 제사 열흘 전부터 시아버지의 전화는 이어졌다.
미리 생선을 사다가 말려놓아라, 제사음식은 어떻게 할 거냐, 장은 어디서 봐갖고 올 거냐, 부산에서 친척들 올라오시는데 마중은 누가 갈래 등등. 제사 참석차 방문하시는 시작은어머니와 시사촌큰어머니는 서울에 온 김에 며칠 더 계시며 서울구경을 하고 싶어 했고, 여행가이드 역할은 자연스레 덤으로 주어졌다. 남편은 바쁜 회사생활 중에 맛집을 모시고 다니며 식사 대접을 해드리고, 기차표를 미리 준비해 역에 모셔다 드리는 일 등을 도맡아 했다.
‘보여주기식 제사’가
끝나고...
그렇게 어머니 돌아가신 후 3년 정도 제사를 지내고 난 후, 더 이상 부산 친척분들은 올라오시지 않았다. 이는 큰 의미가 있었다. 평생 부산에서 모시던 제사를 서울에서 혹시나 소홀히 지내지는 않는지 걱정하시던 분들이 사라진 것이다. 한마디로 보여주기식 제사의 마침표를 의미했다.
그리고 시아버지와의 모종의 약속을 실현시킬 수 있는 시기가 온 것이다. 3년만 지내자던 제사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다시 3년이 연기됐지만 이제는 보여줘야 할 분들도 안 계신 만큼 이 제사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게 됐다. 넌지시 시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
“아버지, 이제는 제사 안지내도 되지 않나요? 예전에 하신 말씀도 있으시고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아닌 것 같다. 내가 죽거들랑 너희 알아서 해라.”
보여주기식 제사는 끝났지만 지금부터는 시아버지의 마음에 제사는 큰 의미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시동생이 결혼하면서 둘째 며느리까지 맞이하셨으니 더더욱 제사를 지속해야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무엇보다 아버지 본인 입장에서는 제사를 안 지낼 이유가 없었다. 조상님들께 예를 차릴 수 있는 자리였고, 장보는 것부터 음식 차리고, 치우고, 정리하는 모든 일들은 자식들 몫이었다. 손 하나 까딱할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바쁘다는 이유로 자주 못 보는 자식들이 제사 지낼 때는 혼자 쓸쓸히 지내는 집으로 와서, 분주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이니 그것만으로도 흐뭇해하셨다.
그렇게 3년, 다시 3년을 연기하던 제사는 그렇게 수명을 늘려왔다. 하지만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시아버지가 혼자 편히 지내시기 위해 오피스텔로 거처를 옮기신 것이다.
그곳에서는 부엌도 좁고 방이 따로 없어서 모든 식구가 잠을 함께 자기는 힘든 곳이었다. 아버지는 명절이나 제사 때 다 함께 잠을 자고 가는 것을 중요시하셨는데, 그게 힘들어진 것이다. 오피스텔로 이사한 첫 해에는 이런 이유 때문에 명절에도 당일에 찾아뵈었는데, 그것을 영 아쉬워하셨다. 사실 며느리인 내 입장에서는 불편한 잠을 청하지 않아도 되니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너희가 우리 집에서 잠을 자고 가야 하는데...”
“괜찮아요, 미리 음식 만들어서 갖고 와서 차례도 지내고 저녁에 가면 되죠.”
“안 되겠다. 우리 집에서는 이제 잘 수가 없으니 큰 애네 집에서 이제 차례를 지내자. 다음 명절 때부터는 너네 집에서 하기로 하고, 명절 전날 내가 너희 집으로 가마.
사실 내 입장에선 우리 집에서 명절을 보낸다는 게 썩 내키지는 않았다. 손님들이 우리 집으로 와서 주무시고 가신다는 게 이불빨래부터 청소, 먹을 것까지 신경 쓸 일이 많기 때문이다. 또 한 번 시작하면 결코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시아버지의 말씀은 거의 통보에 가까웠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명절과 제사의
모종의 딜이 성사되다
한편으로는 모종의 계획(?)도 있었다. 명절차례와 제사가 내 손으로 넘어왔으니 이제 내 재량껏 해보겠다는 심산이었다. 무엇보다 15년 동안 지내오던 제사를 없애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저희 집에서 명절을 보내는 것은 좋지만,
저도 바쁘게 일을 하는 사람이고 동서도 일이 늦게 끝나는 만큼 제사를 모시는 것은 더 이상 어려울 것 같아요.
지낼 수 있는 날은 지내고, 지낼 수 없는 날은 안 지내고 그렇게 뒤죽박죽으로 해서도 안 될 것 같고요.
집안에 누구라도 음식을 하거나 준비할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힘든 만큼 이제 제사는 명절에만 지내는 것으로 통합했으면 해요.
시아버지는 한참을 고민하시더니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본인이 미리 장을 보거나 음식을 하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일하는 며느리에게 제사를 무조건 모시라고 하는 것도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지난 가을 결혼 후 처음으로 제사에서 해방이 됐다.
광복절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명절을 우리집에서 보내는 것은 그래도 더 낫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공식적인 휴가가 주어지기 때문에 누구의 눈치를 보면서 제사를 지내러 가야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차례상을 모시며, 알 수 없는 그분들을 위한 음식을 차리는 것은 낯설고 적응되지 않는다. 어쩌면 영원히 낯선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