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차,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디자인 안목이 꼭 직급을 따라가지는 않더라고요”
몇 년 전 회사에 유튜브 <워크맨> 촬영이 왔을 때, ‘디자이너로서의 고충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디자인팀 막내 사원이 답했다. 나도 신입사원일 때 있었던 팀이라 최종 컨펌이 나기까지 수정과 번복과 재수정을 무한반복하는 것을 보았기에 어느정도 공감이 됐다. 그런데 후배의 인터뷰를 보며 마음 한켠이 서늘해졌다. 디자인 안목을 ‘능력'으로 직급을 ‘연차'로 바꿔보면, ‘능력이 연차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말로 들리기도 해서이다. 어느덧 7년이라는 적지 않은 연차가 쌓이고 직급이 생긴 나도 후배들에게 고충이었던 순간이 있지 않았을까 돌아본다.(떠오르는 몇몇 분들께 지면을 빌어 심심한 사과를 전한다)
연차와 능력의 상관관계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능력이란 무엇일까. 주니어 시절 내가 생각하는 ‘능력’은 오로지 아웃풋, 결과물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잘 몰랐다. 조직에서 이해관계가 다른 여러 부서가 함께 일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시장에서 고객에게 인정받는 결과와 회사 내부에서 인정받는 결과는 다를 수 있고, 개인의 역량만큼 조직의 협조를 이끌어 내는 것도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직접 부딪치고, 깨져보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이전에는 당장 눈에 보이는 문제 해결 역량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한정된 기회와 자본을 끌어오는 정치력과 동료들에게 신뢰받는 리더십 그리고 일을 대하는 태도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까지 포함하는 개인의 총체적인 역량이 아닐까 생각한다.
귀찮은 일도 기꺼이 해주고 싶은 동료가 있는가 하면 당연히 해야 할 일도 해주기 싫어서 억지로 하게 되는 동료가 있다. 차이를 만드는 원인은 다양하다. 조직 내 정치적 이유나 직급의 힘일 수도 있고, 개인적인 친분일 수도 있다. 그러니 일을 실제로 잘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일이 되도록 주변 정세를 잘 읽고 활용하는 능력도 중요하다. 나의 역량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맡았을 때, 이 일을 누구한테 부탁해야 하는지 알고 실제로 도움을 받아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한 능력이다. 앞으로 연차가 더 쌓이고, 다양한 직급을 경험해보면 생각이 또 달라지겠지만.
연차에 비례해서 확실히 좋아졌다고 느끼는 부분은 정보력이다. 회사 내 무수한 팀과 구성원의 역사를 알게 되었고, 그에 따른 조직개편이나 인사발령의 의도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업무를 보면 담당팀과 담당자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제는 복잡한 회사 조직도를 얼추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 있다. 그래서 정보력이 좋아진 만큼 능력도 늘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닌 것 같다. 회사 내부에 대한 정보에는 밝아졌지만 이것이 문제 해결에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다. 그리고 회사 내부에서 쌓은 정보는 여기에서만 유효하다. 회사 밖을 나가는 순간 별로 쓸모가 없어진다. 업계 전체의 관점에서 나의 역량을 냉정하게 진단해볼 때 정보력뿐인 연차라면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트렌드 분석가 김용섭은 『프로페셔널 스튜던트: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사람들의 생존코드』에서 이렇게 말한다. “과거에는 맞았지만 지금은 틀린 게 연공서열, 위계구조 중심의 조직이다. 나이와 연차, 직위만 믿고 안일하게 대응해서는 산업 변화 속에서 생존하지 못할 것이다.” 규칙이 달라지면 경험은 방해가 되기도 한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모든 것이 재정의 되고 새로운 질서가 생기고 있다. 7년이라는 적지 않은 연차가 쌓인 나도 생각이 많아진다. 연차를 빼면 나에게 무엇이 남아 있나. 앞으로도 시간은 쉼 없이 흐르고 연차는 쌓일 텐데 나는 어떤 역량을 키울 수 있을까.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지만 연차만 믿었다가는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겠다.
* 이 글은 2022년 8월 28일 #유어바이브(한국일보가 창간한 2535 MZ세대를 위한 뉴스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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