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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근정 Aug 23. 2022

적당함의 미학

슬기로운 다중이생활(2)

내가 태어난 1989년, 여성의 기대수명은 76세였는데 30여년이 흐른 2020년 기대여명이 52세로 늘어나 기대수명이 84세로 늘었다. 현재 법적 정년퇴직 나이는 60세이지만, 올해 3월 미래에셋연금센터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국내 임금근로자의 평균 퇴직연령은 49.3세다. 여성 근로자는 이보다 더 이른 시기에 퇴직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기대수명은 90세 가까이 늘어나있을 테니, 나는 아마 40대에 퇴직할 것이고 그 이후에도 40년 넘게 더 살아야한다고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빠른 은퇴를 계획하는 파이어족도 있지만 나는 최대한 오래 건강하게 일하고 싶다.


평균 기대수명 90세를 바라보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중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러니 여러 자아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한다. 요즘 나는 ‘엄마 자아'의 비중이 가장 크다. 그런데 새벽부터 일어나 공들여 만든 이유식을 모두 뱉어내는 아기와 씨름한 날에는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컴컴한 터널에 갇힌 듯한 기분이 든다. (육아를 해보신 분들은 이 복잡하고 울컥한 심정을 이해하실 것이다.) 그럴 때면 소설로 달아났다. 잠시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고 오면 환기가 되었고, 긴 시간이 압축된 소설을 읽으며 ‘다 지나가리라’는 진리를 다시금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나면 다시 육아에 쏟을 힘이 생겼다. 글이 잘 안 써지는 날에는 노트북을 던져두고, 아기와 함께 뒹굴며 놀았다. 땀흘리며 놀다보면 어느 순간 새로운 글감이 떠올랐다. 육아도 집안일도 서툴러 자책할 일이 많은 초보 엄마는 그때그때 상황에 필요한 자아를 꺼내 쓰면서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너그러워 졌다. 물론 모든 것이 마음 같지 않을 때도 있다. 그래도 이제는 예전만큼 상심이 크지 않다. 여러 개의 자아가 있으니 그중 하나가 잘 안 되더라도 나의 세계가 와르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중국의 고대 병법서 『삼십육계(6부 패전계)』의 마지막 비법은 ‘불리하면 도망치라’는 내용의 「주위상」이다. 상대가 강해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을 때, 싸워서 지거나 항복하면 끝이지만 도망치면 후일을 도모해나중에 형세를 역전할 수도 있다. 나도 삼십육계 줄행랑 비책을 슬기롭게 쓰기로 했다. 벌여놓은 일들이 도저히 감당 안 되는 날에는 적당히 하고 도망갔다. 그래도 괜찮다. 그래야 포기하지 않고, 쉬었다가 재개하며 계속할 수 있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집으로 집에서는 회사로, 지금은 휴직 중이니 사이드프로젝트로 도망쳤다. 현실에서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렸을 때, 도망갈 곳이 있다는 사실은 한층 더 복잡해진 나의 세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자아를 꼭 커리어와 연결시킬 필요도 없다.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생계를 유지하면서, 원하는 일을 병행하면 된다. 이전에 '좋아하는 일을 한다 vs 하는 일을 좋아한다' 중에 무엇이 더 나은지 고민 한 적이 있다. 그러다가 좋아하는 일이 꼭 하나일 필요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학계 정설에 따르면 좋아하는 것이 많아질수록 일상에서 행복해질 가능성도 높아진다. 재능이 부족하거나 충분히 시간을 내기 어려운 상황이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즐겁게 몰입할 수 있는 여러 자아가 있다면 우리의 일상은 더 윤택해질 것이다. 전문 강사는 아니지만 때때로 강의나 강연을 하고, 아이가 낮잠잘 때 틈틈이 글을 쓰는 시간은 반복된 일상에 지친 나에게 새힘을 불어넣어준다. 공들여 쓴 글이 주변에서 좋은 반응을 얻는 날에는 ‘이러다가 전업 작가 되는 거 아닌가'라는 기대감에 마음이 부풀기도 한다. 다중자아가 있기에 덤으로 누리는 기쁨이다.


다중자아로 살아가는 일은 성공의 법칙이라 일컬어지는 ‘선택과 집중'과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맞다. 반대로 ‘분산과 적당히' 가깝다. 나의 에너지를 분산해서 쓰고, 언제 어떤 기회가 생길지 모르니 여분의 에너지를 남겨둔다. 그리고 무엇이든 영혼이 잠식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한다. 나의 기준에서 충만함이라는 보상을 그때그때 누리면서 계속 한다. 그래야 번아웃에 빠지지 않고 오래 지속할  있다. 그래서 나도 글을 꾸준히 써보려 한다. 아이를 키우면서 직장을 다니고,  과정에서 내가 겪는 시행착오를 말과 글로 나누는 사람. 어느 하나 탁월한 경지까지 오르지 못하더라도, 크고 작은 나의 성공과 실패가 개인적인 경험에서 공동의 자산으로 진화해 나의 아이에게, 미래 세대에게 전해진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딴짓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라고 말하는 세계적인 동물행동학자 최재천 교수의 신작 『최재천의 공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젊은 친구들, 너무 두러워 하지 말자. 어차피 조금은 엉성한 구조로 가는 게 낫다. 이런 것에 덤벼들고 저런 것에 덤벼들면, 이쪽은 엉성해도 저쪽에서 깊게 공부하다 보면, 나중에는 이족과 저쪽이 얼추 만나더라. 깊숙이 파고든 저쪽이 버팀목이 되어 제법 힘이 생긴다...뭐든 한참 하면 엉성한 곳들이 슬금슬금 메워진다…외나무다리를 비틀비틀 아슬아슬하게 건너가는 사람을 응원해주면 좋겠다. 떨어지더라도 밑에 튼튼한 그물망이 있으면 더 좋겠다."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다짐했다. 엉성하더라도 나의 삶을 성실하게 기록해나가겠다고. ‘성실하게'라는 말이 어딘가 촌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의 두 발을 땅에 단단하게 붙이고 또박또박 성실하게 걷다 보면 부족한 나도 조금씩 메워지고 채워지겠지. 그리고 한 번 넘어진다고 해서 낭떨어지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사회적 그물망이 조금 더 촘촘히 생기기를 바란다.


진무송 김찬연 / 소설 삼십육계 36:주위상(6부 패전계)/ 2011 / 350p


최재천/김영사/2022/304p


* 이 글은 2022년 8월 21일 #유어바이브(한국일보가 창간한 2535 MZ세대를 위한 뉴스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s://yourvibes.co.kr/?p=28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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