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근정 Jul 10. 2022

조용한 사이드프로젝트

슬기로운 다중이생활(1)

“화려하게 노래하고 춤추는 나랑

자연 속에서 봉사하고 요하가는 나,

둘 중 누가 나일까?”


올 상반기에 즐겨보았던 예능 『서울체크인』에서 이효리가 엄정화에게 묻는다. “둘 다 너라고 생각해.” 엄정화가 답한다. ‘왠지 본성은 하나일 것 같잖아'라고 이효리가 이어 말하자 엄정화가 ‘아니야, 너는 다중이야'라고 말해준다. ‘맞아, 그렇지' 맞장구치며 보았다. 일찍이 가수로서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던 이효리가 데뷔 24년 차인 지금까지도 대중들에게 폭넓게 사랑받는 이유는 바로 ‘다중자아와 멀티커리어'덕분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톱스타 이효리의 노래와 무대도 좋아하고, 제주댁 이효리가 유기견 봉사를 하고 요가로 심신단련하는 일상적인 모습도 좋아한다. 여러 개의 자아를 운용하며 그에 맞춰 다양하게 커리어를 변주해온 이효리를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이유로 좋아한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2012년 포브스(Forbes) 칼럼에서 라리사 포(Larissa Faw)는 밀레니얼 세대의 ‘멀티커리어이즘’(multi-careerism) 현상을 예견했다. “밀레니얼 세대는 그저 1루수이거나 좌익수거나 하지 않아요, 그들은 ‘운동선수’죠. 그들의 외장하드는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게끔 어디에든 연결될 수 있어요.“(비아콤(Viacom)의 혁신사업부 로스 마틴(Ross Martin)의 말 인용) 이후 기존 노동시장의 제도권 밖에서 독립적으로 일하는 사람(Independent worker)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일정한 소속이 없는 프리랜서와는 조금 다르다. 멀티커리어를 추구하는 인디펜던트 워커는 한 곳 혹은 여러 곳에 소속된 채로 다양한 자아를 발현시키면서 직무 전환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수입원 다변화 방안을 모색한다. 우리나라에서 본캐와 부캐로 정체성을 구분짓고,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을 ‘프로 N잡러’라고 부르는 것도 하나의 멀티커리어리즘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꼭 유명인이나 프로의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미 N잡러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도 많다. 대학에서 간호학을 전공한 내 동생은 대학교 때 유튜브를 시작했다. 졸업 후 대학병원 간호사로 일을 하면서도 한동안 유튜버 활동을 병행했다. 그러다 병원을 그만두고 1년간 다시 공부하더니 (놀랍게도) 약대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니, 유튜버 경력도 도움이 된 듯 하다. 콘텐츠를 직접 만들고 구독자의 피드백을 받으며 채널 하나를 스스로 운용해본 경험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야하는 상황에서도 유용했다. 밀레니얼 세대에 턱걸이하고 있는 나는 포털보다 유튜브 영상 검색을 먼저 하는 동생을 보면서 이미 대세는 ‘멀티커리어리즘’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느꼈다.


그런데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 직장인의 경우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소속된 회사에서 보내고, 여전히 ‘멀티커리어’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첫 출근을 앞둔 동생이 ‘언니, 나 유튜브 하는 거 병원에서 얘기해도 될까?’라고 물었을 때, 나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했다. 신입사원은 실수하기 마련인데 그 때 동생이 “유튜버 하느라 본업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선입견으로 필요 이상 비난을 받게 될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예견된 저성장 시대, 내리막 세상에서 나를 지키며 가치 있게 일하기 위한 철학서 『일하는 마음』에서 제현주 작가도 말한다. “아무리 심지가 굳은 N잡러라도 일에 문제가 생겼을 때, ‘당신이 여러 가지 일을 하느라 이 일에 충분히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와 같은 이야기를 자꾸 듣다 보면 자기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처음에는 여러 가지 일을 한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고, 안정감이 생기고 전체 상황을 조율할 수 있게 되면 그때부터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도 방법이라고 저자는 조언한다. 처음에는 가볍게 다양한 가능성을 경험해본다고 생각하면, 일일이 해명해야 하는 감정 소모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개인적인 휴직으로 갭이어를 갖고 ‘사이드프로젝트'를 실행해보는 현실적인 방법도 덧붙이고 싶다. 나는 지난해 입사 6년만에 육아휴직을 시작하며 1년 3개월이라는 갭이어를 보내는 중이다. 그동안 생각만 해오던 ‘사이드프로젝트'를 하나둘씩 실행에 옮겼다. 일단 당장 시작할 수 있도록 작은 규모로, 혼자 조용히 했다. 아기가 잠들고 난 뒤 누구도 청탁하지 않은 글을 쓰고, 미지의 수강생을 상상하며 스피치 강의안을 만들었다. 익명의 독자들과 주변에서 보내주는 공감과 지지에 보람을 느끼며 계속 하다보니 지금은 기고할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 앞에 앉아있다. 조용한 사이드프로젝트가 멀티커리어로 확장 된 것이다. 멀티커리어라는 큰그림을 주도면밀하게 계획했다기보다는 내 안의 여러 자아가 우연한 기회에 발현되면서 어쩌다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 중이다. 평범한 직장인에게 ‘엄마 자아'가 생겨서 ‘일하는 요즘 엄마의 육아 에세이’를 썼고, 대학교 때 프리랜스 아나운서로 일했던 경력에 직장생활의 내공이 더해져서 ‘스피치 강의'로 재탄생되었다. 새로 생긴 정체성이 이전 커리어와 결합하자 예상하지 못한 시너지가 생겼다.


우리 세대는 더 이상 회사가 정년을 보장해주지 않고, 나 역시 한 조직에서 고인물로 정년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변화를 슬기롭게 마주해야한다. 기회는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온다. 회사와 직무, 직업과 직위는 앞으로도 계속 바뀔 테지만 그 과정에서 나만의 고유한 역량을 발견하고 키우는 것은 나의 몫이다.

서울체크인/티빙/2022


제현주/어크로스/2018/256p



* 이 글은 2022년 8월 14일 #유어바이브(한국일보가 창간한 2535 MZ세대를 위한 뉴스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s://yourvibes.co.kr/?p=28302


이전 07화 지금 여기, 나의 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