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멘토링의 교훈
신입사원일 때 ‘역멘토링'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세대와 직급을 뛰어넘어 소통하겠다는 포부를 담은 프로그램으로, 신입사원이 멘토이고 팀장이 멘티여서 ‘역멘토링'이다. 그때 만난 어느 중년의 멘티는(팀장)는 멘토(신입사원)인 나에게 앞으로의 회사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이 될 승진과 고과에 대해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었다.
“팀장은 팀원이 스스로에게 준 점수 이상 줄 수가 없어요.
그러니 우선 내가 나를 높게 평가해야 합니다.”
멘티의 조언대로 연말마다 진행하는 자기 평가에서 나는 나에게 최고 등급을 주었다. 그러려면 연초에 KPI(Key Performance Indicator)를 잘 세워야 한다. 평가의 객관성을 확보하려면 근거가 필요하다. 매뉴얼에 따르면 최고 등급의 기준은 직급에서 요구하는 역량의 120% 성과 초과 달성이다. 그러므로 지난해보다 도전적인 목표를 설정하되 업무 성과를 수치화할 수 있도록 평가 기준을 세팅해야 한다. 이를테면, 기존 예산 투입 대비 증대 효과, 효율적인 예산 집행 등과 같이 정량적으로 수치화할 수 있는 항목들이다. 당시 나는 브랜드전략팀에서 월간 회원 소식지 기획업무를 맡고 있었다. 처음에는 5% 여유분을 발주했는데, 실제로는 더 타이트하게 수량을 예측해서 발주했고, 절감된 수량과 금액을 근거로 나의 업무 성과를 수치화했다. 이듬해에는 3%로 목표수치를 높였고, 그 이듬해에는 불필요한 내부발송 폐지, 소액 이용회원 발송 제외 등의 개선 방안을 제안하며 계속해서 비용 효율성을 높였다. 수치화하기 어려운 디자인 기획, 버벌 브랜딩과 같은 정성적인 분야는 디자인 리뉴얼, 콘텐츠 개편 등의 프로젝트 목표를 따로 세워서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혼자 만들어했다. 신입사원이 맡는 일은 보통 주요 업무가 아니라 실수없이 하던 대로만 해도 되는데, 나는 다르게 해 보려 애썼다. 그 과정에서 문제도 꽤 일으켰지만.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일에 힘쓰는 나를 보며 의아해하는 동료들도 있었지만, 연말에 최고등급으로 예정된 자기 평가를 위해 기꺼이 했다. 멘티에게 코치를 받은 대로 최선을 다했으니, 진정한 역멘토링이 이루어진 셈이다.
그래서 고과를 잘 받았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평사원 시절 항상 평균 고과를 받았다. 그렇지만 인사평가 후 이어진 면담에서 공통적으로 ‘미안하다'라는 피드백을 받았다. ‘같은 직급의 사원에 비해 일을 잘 하지만, 합당한 고과를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알다시피 올해는 우리 팀에 승진을 밀어줘야 하는 선배가 있어서 고과를 잘 주지 못했다.' 등등. 현실은 낮은 고과를 받게 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 다만, 결과적으로 같은 고과를 받게 되더라도 평가자들로 하여금 미안함을 느끼게 만들고 싶었다. 대충 둘러대는 핑계일수도 빈말일수도 있겠지만, 잠시라도 나에게 마음의 빚을 지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 차례가 왔을 때, 더 당당하게 요구하고 싶었다.
나는 평사원일 때 매번 스스로에게 최고 등급을 주고 평균 등급의 고과를 받았지만, 누락 없이 승진했다. 우리 회사는 직급별 연봉 테이블을 따라서 승진이 곧 연봉 인상과 직결되기 때문에 고과보다 승진이 더 중요하다. 당시 내가 있던 부서는 승진 누락자가 많아서 ‘주니어들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팀이었는데, 내가 유일하게 누락 없이 승진한 주니어 케이스가 되었다. 실제로 성과를 낸 덕분인지, 성과를 냈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덕분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승진이나 고과와 같은 결과보다 그 과정에서의 ‘자기평가'가 나에게는 더 중요했다는 사실이다. 상급자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 일하는 내 모습이 내 마음에 드는지가 나에게는 더 중요했다.
고과는 잘 나올 때도 있고, 안 나올 때도 있다. 입사 후 내가 가장 낮은 고과를 받은 해가 있다. ‘팀 이동으로 대표 프로젝트가 없다’는 것이 고과 면담에서 받은 피드백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회사의 매각과 조직개편 이슈로 1년간 3번의 부서이동을 하면서 새로운 업무에 적응을 할 때 즈음 다시 업무가 바뀌곤 했다. 그래서 ‘고과를 잘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자 팀장은 ‘성과가 나는 업무를 받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누구나 일을 맡기면 중상 수준까지는 해내기 때문에 애초에 성과가 날만한 좋은 업무를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만일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사회생활을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라면 시작은 조금 더 무모해도 괜찮다. 주니어 시절에는 어차피 작은 프로젝트를 맡기 때문에 ‘저 잘할 수 있어요! 저 잘했어요!'라고 패기 있게 외쳐도 크게 문제 될 일이 없다. 하지만 연차가 쌓일수록 자기실현적 예언만으로는 결과를 만들기 힘들다. 객관적인 자기 성찰이 부족하면 아마도 좋은 프로젝트를 맡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 이 글은 2022년 9월 4일 한국일보 <유어바이브>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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