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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진 Jan 17. 2022

영향력 있는 사람

인플루언서

인플루언서는 '영향력'이라는 뜻의 단어인 ‘influence’에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인 ‘-er’를 붙인 것이다. 즉, 인플루언서는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이해하면 된다.


대개 인터넷 방송이나 SNS에서 협찬이나 광고로 수익을 내거나 공구를 하며 돈을 버는 사람들을 인플루언서라고 다. 유튜브에 '인플루언서'를 검색하면 '인플루언서 되는 법', '인플루언서 수익'이 연관으로 뜬다.

그래서 '인플루언서'라고 하면 '돈벌이'와 관련된, 사업적이고 직업적인 용어라고 생각해 왔던 것도 사실인데, 어원 자체만 보면 참으로 심플하기 그지없다.

영향력이 있는 사람.('파워 블로거' 같은 말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긍정적 용어 설정을 참 잘한 듯.)


내향형 인간에다가 광고 홍보 같은 것은 여엉 성향에 안 맞는 나 같은 사람도, 생각해 보면 언제나 인플루언서를 꿈꾸었다.

소설가라는 꿈을 유예(... 과연?)하고 독서 교재를 만드는 일을 오랫동안 해 오면서도 '내가 고른 발문 안에 녹아 있는 나의 생각이 수만 명에서 전달되는 것'에서 가장 큰 기쁨을 느꼈다.

더 작은 규모의 독서논술 학원에서 일했을 때에도, 대학 때 학생들 과외 수업을 했을 때에도, 지식 전달이 아닌 수다의 시간(... 어이!)을 진심으로 즐겼다. 그렇게 잠시나마 서로의 인생 이야기를 나누었던,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 된 친구(=제자) 몇 명이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가끔 안부 인사를 전해 올 때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선가  한 외국 교육자의 장례식에 대한 이야기 생각난다.

한 노인의 부고가 신문에 뜨자, 전국 곳곳에서 사들이 모여들었다. 신기한 것은 그녀의 장례식에 모인 다양한 연령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선생님이 가장 아끼시는 제자인 제가 어찌 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

원문 출처도 그 훌륭하신 선생님의 이름도 가물가물하지만 '선생님이 가장 아끼시는 제자'라는 문구만큼은 정확하게 기억이 난다. 이 문구 때문에 한참 고개를 갸웃거렸던 기억도 난다.

번역의 노이즈를 제거하고 다시 들여다 보면 잔잔한 감동이 몰려온다. (선생님이 설마 제자들 하나하나에게 "네가 나의 가장 소중한 제자야."라고 말했을 리가.)

 수많은 사람들 최상급의 라포를 형성하고 선한 향력을 끼친 선생님의 삶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그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참으로 큰 산이지만.


그 선생님이 여성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연관 지어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존경하는 우리 엄마.

평생을 초등교육에 몸담아 오신 엄마는 평교사부터 시작하여 꾸준히 자기 계발과 성장을 거듭해 오신 커리어우먼이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초등학교 교감 교장을 거쳐 현재는 교육청에서 근무하고 계신다.

(아직도 친정엄마가 현역 공무원이라고 하면 의아해하는 분도 많다. 워낙에 젊은 엄마라서 내가 중고등학생 시절에도 밖에 나가면 엄마가 아니라 언니 아니냐는 소리를 듣기 일쑤였고. 이 정도는 양반이지, 아빠는 가끔 재가한 거 아니냔 소리도 들으셨으니...ㅎㅎㅎㅎㅎ

사실 엄마의 젊음은 나이가 아닌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이들을 가까이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쌩쌩한 아이들로부터 젊음의 기운을 나눠 받으시는 게 분명하다. 전교생 이름을 외우다시피 하고 학생들한테까지 편지를 받는 교장 선생님이 어디 있... 막간을 이용한 엄마 자랑을 해 본다.)


교육자가 많은 집안에서도 엄마만큼 소위 '출세'한 사람이 없기는 하다만, 엄마의 직책이나 성취보다도 늘 자랑스럽고도 부러웠던 은 엄마가 때마다 받아들고 오셨던 편지다.

내가 어릴 적, 스승의 날이면 아이들이 또 학부모가 꾹꾹 눌러쓴 정성 어린 손편지들이 거실을 가득 메우곤 했다. 나는 (그게 사생활 침해인 줄도 모르고^^;) 저녁 내내 엄마 앞으로 온 편지 펼쳐 읽다. 그 안에는 늘 가슴찡하 눈물 핑 도는 생생한 이야기들이 있었다.

교감직을 그만두시고 교장 발령을 받으실 때에도, 교육청으로 불려 가시며 첫 교장을 맡았던 학교를 떠나실 때에도, 언제나 엄마와의 이별을 아쉬워하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는 감사와 응원의 편지가 한 보따리씩 들어왔다.

엄마는 본인이 받은 편지들을 보며 한참씩 눈물을 흘리곤 했다. 아빠랑 는 그런 엄마를 보며 '울보 찡찡이'라고 함께 놀렸.


참 좋았다.

항상.


사랑하는 엄마보다 존경스러운 엄마.

게 엄마는 이런 존재이다.

나보다 앞선 시대에 삼 남매를 두고서 워킹맘으로 살아온 엄마의 고충과 양육에 대한 아쉬움을 내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는 싶지만,

아이를 낳고서도 멋지게 일하는 여성이 되고 싶다는 의지와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살다 가고 싶다는 목표를 심어준 사람이 우리 엄마이다.


그저 큰 산처럼만 보였던 엄마는 이제와 다시 보니 나보다 먼저 큰 산을 오르고 계셨던 것도 같다.

목표한 산이 있기에 숨을 고르고 또다시 산을 오른다.

나는 부모님을 뒤따라 오, 끌어주시는 그 손을 잡기도 했다가, 혼자 샛길로도 빠져 보았다가, 또다시 만나 함께 오르기도 한다.

 길에서 남편 만났고 또 다른 동료들도 만났다.

지쳐서 잠시 쉬어가더라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어쩌면 우리가 함께 정상에 올라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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