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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진 Jul 31. 2021

[서평] 오직 두 사람

나와 당신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김영하 작가의 <오직 두 사람>은 동명의 소설을 포함하여 일곱 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 소설집이다. 알쓸신잡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김영하 작가가 자신의 프러포즈 경험담을 소개하는 것을 보며 이 소설집에 대해 알게 되었다. (국문학도 시절엔 김영하 작가 소설은 모두 찾아보며 탐독할 정도로 팬이었는데, 출산과 육아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며 신간이 나온 줄도 모르고 있다가 한참 후에서야 텔레비전으로 출간 소식을 접했다.) 자신이 쓴 소설을 읽어 주며 지금의 부인에게 프러포즈를 했다는 이야기는 작품의 제목만큼이나 달달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달달한 것은 제목뿐이었다. 그럼 그렇지. 연인 간의 달달한 러브 스토리일리가. ‘오직 두 사람만이 느꼈을 어떤 어둠에 대해서’라는 부제에서처럼 김영하 작가가 인간을 바라보는 특유의 시니컬함과 깊은 통찰력이 느껴졌다.


 주인공인 현주는 ‘보고 싶은 언니에게’라며 메일의 서두를 연다. 큰 수술을 마친 아빠의 병간호를 하고 있는 근황 이야기로 시작하여 현주 자신과 아빠가 겪어온 지난 나날들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는 긴 메일 한 통이 소설의 전문이다. 메일 수신인인 언니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지만, 작품을 통해 이 언니가 현주의 친인척은 아니지만 현주가 속마음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 있을 만큼 심적으로 가깝고 편안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주는 독신 여성이며 아빠의 특이한 성격을 참아내지 못하고 떠난 엄마, 오빠, 여동생과 달리 아빠의 곁에 남아 있는 유일한 혈육이기도 하다. 작품 초반에 드러난 이런 설정은 주변에 있을 법한, 흔하지는 않더라도 한두 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한 이혼 가정의 이야기로 읽힌다. 하지만 현주와 아빠의 관계에 대한 설명은 갈수록 묘하고 답답해진다.


 김영하 작가는 최근 출간한 에세이집에서 소설가가 인물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밝힌 적이 있다. 자신이 가르치는 작가 지망생들에게 글에 등장하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물어보았을 때, ‘평범한 회사원’, ‘평범한 대학생’ 같은 답변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면서 그런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 주위의 필부필부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평범한 사람은 없다는 의미이다. 이는 평범하게 보이는 누군가의 ‘다름’과 ‘이상함’을 끝까지 추적하는 것이 작가의 일이라는 작품 후기의 내용과도 같은 의미로 읽을 수 있을 것다.


 <오직 두 사람>에 등장하는 아빠와 현주는 이런 맥락과 딱 들어맞는 부녀관계이다. 학 교수인 현주의 아빠는 학식도 있 몸도 다부진 매력적인 인텔리 지식인이다. 한편 고지식하고 가부장적이며, 사실은 낮은 자존감에 기인한 뾰족하고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결정적으로 여성 편력이라는 큰 흠결도 있다. 이런 아빠에게 편애를 받으며 자라온 큰딸은 아빠를 마냥 동경하고 긍정하는 아이였다가 성인이 되어서야 아빠에게 밝은 면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도 너무나도 좋아하고 존경하는 아빠와 쉬이 거리를 둘 수 없고, 다른 가족들이 모두 아빠를 떠난 뒤에도 아빠 곁에 남았으며, 아빠라고 하높은 기준 때문에 다른 남자는 시시해서 만나지도 못하는 사람이 된다.  

 현주는 아빠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아빠를 끊기 힘든 담배 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부모님의 이혼 후 시간이 흐르아빠의 사생활을 너무 속속들이 알게 되고, 아빠를 위해 아빠의 여성들에게 직접 개입까지 하게 되면서 어딘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문 앞에서 그 여자가 그러더군요.
 "난 못 배웠어요. 그래서 배운 사람들은 나한테는 없는 교양이라는 게 있는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니라는 걸 아버님 보고 처음 알았고요. 오늘 또 알았네요. 아버님 잘 모시세요."
 거기가 바닥이었어요. 더 내려갈 데가 없는 곳.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집에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몰라요. 와서 울지도 않았어요. 슬픔, 서러움, 억울함 이런 마음보다는 위기감이 들었어요. 수렁에 너무 오래 빠져 있어서 수렁인 줄도 몰랐구나 싶었어요. 지금이라도 탈출하자.
 - 30쪽



 현주는 아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에 있는 엄마와 여동생을 찾아가 보지만 그들에게 이해받는 듯한 안도감을 느낀 것도 잠시뿐이다. 자신을 큰 트라우마라도 있는 사람인 양 측은하게 여기는 동생 현정이의 시선이 불편하고, 겉보기엔 평온한 일상이 권태롭고 공허하기만 하다. 미국으로 오면서 어렵게 아빠와 담배를 동시에 ‘끊었’던 현주는 자신의 공허감이 둘 중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궁금해한다.



 아빠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분명히 알았어요. 내 삶의 더 커다란 결락, 더 심각한 중독은 아빠였다는 것을. (중략) 저에게는 아빠가 모국어예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한다는 느낌이 있어요.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냥 운명 같은 거예요.
 - 38쪽



 아빠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현주는 엄마와 동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모국 땅, 아빠의 곁으로 다시 돌아온다. 현주는 미국에서 늘 이방인이었다. 소위 정상적인 가족들과 함께 있었어도 자신은 그곳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현주는 모국에 대한 강한 향수에 이끌려 아빠에게 운명처럼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현주는 큰 수술을 마친 후 이미 식물인간에 가까운 아빠의 곁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빠, 나 담배 다시 피운다.”
 아빠가 그 말을 알아들었을 리가 없는데, 어쩐지 희미하게 웃는 것 같기도 했어요.
- 65쪽



 말로 하지 않아도 서로 통하던 아빠가 자신의 말을 듣고 희미하게 웃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현주의 감상이 절절히 와닿았다. (이 부분입니다! 독자들이여, 여기가 바로 '모국어'로 상징되는 특별한 관계에 있는 오직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궁극의 소통이라고요!)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게 되었다는 현주의 말이 “나 아빠에게 돌아왔어.”라는 나긋한 고백으로 들리지는 않는가. 담배를 다시 피운다는 문장과 아빠에게 돌아왔다는 문장이 같은 의미일 수 있다는 것은 현주와 아빠의 삶이 속속들이 드러난 이 메일(=소설)을 읽고 난 독자들만이 비로소 알 수 있다. 다른 가족들을 포함하여 현주 주변의 그 누구도 이 말을 해석해 낼 수 없을 것이다. 외국어의 관용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알아야 하듯이. 아빠를 잃은 현주의 마음을 희소한 모국어를 공유하던 소수 민족의 유일한 생존자의 심정에 빗대어 표현한 것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적절하다.


 대개 ‘특별한 관계’라고 하면 사람들은 찰떡궁합이란 말처럼 서로의 말과 생각이 잘 통하는 사이 같은 긍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정말 특별한 관계는 그 깊이가 너무나도 지극하기에,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해 보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현주와 아빠는 가족들에게조차 이해받기 힘든 관계였지만, 작가는 어쩌면 이들의 관계야말로 진정으로 특별한 사이였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사실, 이 단편에 대한 감상을 정리해 보고자 다른 사람이 쓴 <오직 두 사람>의 서평과 추천 글들을 몇 개 검색해서 읽어 보았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내 생각과 비슷한 글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정상적이지 않은 아버지에게 세뇌 당하여 비정상적으로 성장한 딸이, 끝내 아버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홀로 임종까지 책임지는 이야기. 그러한 딸이 겪은 상실의 이야기."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렇게 읽은 작품을 두고 굳이 굳이 '프러포즈 소설'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내가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나의 감상을 포기할 수 없다. (애초에, 문학 작품의 감상을 꼭 남들 따라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작가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 역시 정상이 아닌 이들에 대한 얄팍한 이해나 동정 아닐 것이다. (그리고 또 애초에,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정상이 아닌' 이들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실존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며, 결국은 우리 자신의 일부인 것을.)

 김영하 작가가 어쩌면 지식인으로서 자신이 지닌 속성을 현주의 아빠 캐릭터에 더 많이 대입하며 이 작품을 쓰지 않았을까 감히 짐작해 본다. 솔직히는 내가 그렇다. 나는 현주의 아빠 입장에서 현주처럼 끝까지 내 곁을 지켜줄 단 한 사람을 지극히 원하는 미욱한 인간이다.

 

 나는 이 작품을 정성스럽고 진솔한 프러포즈 소설이라고 명명하기로 결심하였다. ‘우리 사이는 남들 보기에 미친 구석이 있을 정도로 특별하다’는 당돌한 고백. 혹은 '나의 어둠을 알고서도 내 곁에 있줄 수 있겠느냐'는 절절한 질문. 현주가 아빠에게 건넨 마지막 말에서 긍정적인 냄새를 조금이라도 맡을 수 있는 감수성의 소유자라면 이들의 관계를 절대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상대방의 밝음뿐 아니라 어둠까지 속속들이 알고서도 결국 돌아와 곁을 지키는 오직 두 사람의 사이를 어쩌면 동경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누구나 타인과 특별한 관계 맺기를 꿈꾸고, 진솔한 소통을 하고 싶어 한다. 실제로 '모국어(mother tongue)'란 자의와 관계없이 운명 지어지는 환경적 요인이긴 하다만, 작품 속에서 현주와 아빠가 공유하는 모국어는 자의와 무관하게 운명 지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서로가 애정 어린 시간들을 오랫동안 공유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주의 다른 가족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진한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 관계라고 해서 마음까지 다 통하는 것도 아니다. 평생을 부대끼며 가까이서 살아온 가족끼리도 그러할진대, 정체성이 다 형성되고 난 이후 만난 성인 두 사람이 서로 진솔한 소통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지난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일일까. 또한 진솔한 소통이 가능한 관계란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까.


 작중 메일의 수신인으로 설정된 ‘언니’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짚어 보고 싶다. ‘언니’는 주인공이 자신의 삶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인물이다. 아빠와는 또 다른 의미로 특별한 존재이다. 안네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듯한 이러한 설정은 (개인적으로는 작중의 '언니'가 실존 인물이 아닐 것이라 추정한다.) 독자가 현주의 삶 전체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현주는 아빠가 돌아가신 후 쓰다 만 메일을 갈무리하며 자신은 ‘괜찮다’고, 앞으로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삶에 대해 ‘그냥 좀 허전하고 쓸쓸할 것 같다’고 담담한 소회를 전한다. 현주에게 다가올 미래가 말 그대로 그냥 좀 허전하고 쓸쓸한 정도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주에겐 '완벽하게 되돌릴 수는 없는, 그저 살아내야 할 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현주의 미래에 언니라는 존재가 적지 않은 위로가 될 것임을 느낄 수 있다. 주인공을 이해하고 종종 위로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존재. 주인공을 어딘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단정하지 않고 고유한 한 인간으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현주의 메일을 읽은 독자 누구라도 그녀의 ‘언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희망을 남겨 둠으로써 아빠를 상실한 현주의 미래가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위안할 수 있다.


 이 달달하지 않은 소설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작품 속 인물들을 포함하여 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 대해 연민과 긍정의 시선을 갖게 되었으면 좋겠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인생을 대리 체험하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각기 개성을 지닌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상대방을 정상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고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그 사람을 그저 이 세상에 유일한 '오직 한 사람'으로 바라봐 주는 것. 이것이 나와 당신 특별하고 진실한 관계 맺기 위해서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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