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육아 일기

미술관 나들이

피카소 전시회

by 박경진

초여름 햇살이 내리쬐는 금요일 오전, 아이 유치원을 하루 빠지고 예술의전당로 마실을 다녀왔다.

2년 가까이 한 동네에서 살던 친정 부모님이 하남으로 처를 아주 옮기시게 되어, 호연이 외할아버지(=울아빠) 함께하는 오붓한 나들이를 계획했다.(출근하셔야 하는 엄마랑은 함께 못해서 죄송해요~!)


마침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피카소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 피카소라면 아이의 첫 미술관 테마로 매우 적절하지!

평소 유치원에는 못 입고 가는 원피스를 꺼내 입히고 이에게 미술관 관람 예절에 대해 설명을 해 준 다음, 한껏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피카소 특별전. 68세 할아버지랑 6세 딸내미는 저렴하게 특별요금.


코로나 시국이지만 피카소 전의 명성 때문인지 대기 줄이 상당히 길었다. 방역 수칙에 따라 티켓팅을 마치고 입장 순번까지 다시 받아서 30여분을 기다렸다가 관람을 시작할 수 있었다.


아이의 첫 미술관 체험이 즐거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오늘 하루 맞춤 큐레이터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초입 부분에 걸 카페 그림을 보면서 삼삼오오 카페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그 시절 예술가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큐비즘 정물화에서 숨은 그림 찾기 놀이 해 보았다.

인물 그림면서는 그림을 그린 상황이 어땠을지 자유롭게 상상 보았다. (나도 정답을 모른다는 것이 함정.)

아이의 집중력이 그리 길지는 않아서 후반부는 후루룩 건너뛰고, 이번 전시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품인 <한국에서의 학살> 앞에 섰다.


<한국에서의 학살> Picasso, 1951


-엄마 아빠가 태어나기 전에, 호연이 할아버지도 태어나기 전에, 우리나라에서 큰 전쟁이 있었어. 호연이 큰할아버지는 그때 어린아이였겠다. 피카소라는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전쟁에 대해서 이렇게 그림으로 표현한 거래.

-저기 왼쪽에 있는 아이가 그럼 큰할아버지야?

-큰할아버지 또래인가? 비슷한 나이셨겠다. 그림에 나오는 사람은 딱 한 사람을 정하고 그린 게 아닐 수도 있. 오른쪽에 총과 칼을 들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고 말이야. 왼쪽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무서웠을 것 같아. 오른쪽 사람들 나쁘다. 오른쪽은 어떤 나라 사람이야?


그때 연이 할아버지가 등판하셨다.

"건 좀 논란이 있단다. 당시 UN군이 어쩌고 저쩌고, 공산주의가 어쩌고 저쩌고..."

음... 저한테 하시는 말씀이죠, 아부지?ㅎㅎ


-피카소 아저씨는 오른쪽 사람들을 다른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렸대. 다른 나라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와서 우리나라 사람들을 괴롭혔다고 말이야. 이런 일이 또 일어나면 안 되겠지?

-우리가 가서 도와주면 어떨까?


엄마의 수준 낮은 답정너 질문은 건너뛰고 아이 던진 천진하고 참신한 질문.

잠시 버퍼링이 걸린 머리를 열심히 굴려 할 말을 떠올려 보다가, 안타까움이 잔뜩 묻어나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그저 지금 네가 참 사랑스럽구나.


-호연이 생각처럼 그림 속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옛날에 일어난 일이라서 우리가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어.

그래도 호연이가 정말 좋은 생각을 했네.


미술관을 나서며 아이에게 말했다.

딴에는 열심히 고른 답변이 영 성에 차지 않는다.

이성과 합리. 판단과 평가.

참 고질적이다, 나도.

당시 시대상과 문예 사조가 어땠고, 피카소의 정치 성향은 어땠고, 다른 명작인 게르니카와 비교하면 이 작품은 좀 어떻고, 또 편으로 피카소의 여성편력이나 자녀에 대한 가스라이팅을 보면 인간적인 평가는 좀 어떻고... 속으로 이런 끄러운 생각들을 하며 '6세 아이에게 맞춘 미술관 큐레이터' 역할에만 취해 있던 스스로가 부끄러진다.

내가 감상을 잊고 있었구나.

모든 것이 조용해지는 순간.

발걸음이 멈추고 시선이 멈추고 말과 생각이 조용하고 느려지는 순간.

이것이 진정한 감상일 텐데.


그래. 내가 너를 안아주는 것처럼, 그림 속 아이도 이렇게 안아줄 수 있으면 좋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림을 보면서 엄마는 이런 생각을 늘 처음 해 보는구나. 이제 와서. 네 덕분에.


아가야.

좋은 것들 많이 보고, 좋은 생각 많이 하고, 좋은 사람으로 자라자.


미술관 나들이 후 호연이의 편지, 엄마의 편지. '존경'이라는 말은 지난 5월 어버이날 행사에서 주워들은 것뿐. 존경의 뜻을 설명해 주었더니 엄마가 머리를 잘 묶어서 존경한단다.


좋은(beautiful) 것, 좋은(nice) 생각, 좋은(right) 사람...

나란 사람은 '좋다'는 말 하나에도 설명거리가 잔뜩인 피곤한 엄마지만, 쓸데없는 말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것을 지양하려 한다.

말을 줄이고, 생각의 결을 고르고, 더 많이 느껴야겠다.


아이에게 배다.

아이와 함께 자란다.




(*2021년 6월의 기록입니다.)




P.S. 브런치를 시작하고 반년 동안 지난 육아 기록을 짬짬이 해 왔는데, 오늘이 2021년 12월 31일, 아직도 반년 치가 남아 있네요.

아이가 커가며 기특한 말을 하는 순간도 많아지고, 그만치 하루하루 기록하고픈 것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마음이 바빠 오지만 그래도 천천히 느긋하게, 보다 단정한 언어로 소중한 순간들을 기록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해피 뉴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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