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유산을 남길 것인가?

정세랑 [시선으로부터,].문학동네

by 여행하는나무


“그는 남들보다 뛰어난 감수성과 재능을 가졌고, 세상의 주목과 동시에 비난이라는 위태로운 저울대 위를 소신 있게 걸어갔다. 그는 비틀거릴지언정 포기하지 않고 끝내 쓰러지지 않았다. 누구라도 존경받을 만한 삶이다.”


아마도 그는 대단한 인물인 것 같다. 하지만 그 사람이 ‘여자’라면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지난 역사 속에서 시대를 거슬러간 여성 예술인들―허난설헌, 나혜석, 프리다 칼로, 루 살로메―은 남성 중심의 사회적인 제약과 억압 속에서도 치열한 예술혼을 불태웠다. 시대를 앞서간 이들은 종종 외면당하고, 억울하게 평가되었으며,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요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세랑 작가는 그런 안타까운 계보의 연장선에서 심시선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냈다. 그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앞서갔다’는 사실 자체가 공격의 대상이 되는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한 인물이다. 하지만 시선은 꺾이지 않았고, 그는 단지 살아남는 데 그치지 않고, 가계를 이루며 후세에도 영향을 미치는 당당한 존재로 그려진다.


책을 펼치자마자 등장하는 ‘심시선 가계도’는 독특한 인상을 남긴다. 그녀의 삶이 단절되지 않고 다음 세대로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등장 인물들이 많아서 헷갈리기도 하여 중간중간 가계도를 보면서 확인하면서 재미있게 읽었다.


심시선 가계도


심시선은 194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겪어냈다. 가족이 전쟁으로 몰살당한 후, 살기 위해 하와이로 사진 신부로 이주했고, 마티아스 마이어라는 예술 권력자와의 인연을 통해 독일로 향했다. 여성의 몸과 꿈을 착취하는 남성 권력자에게 학대와 희생을 강요당한다. 그의 자살 사건 이후 ‘마녀’로 몰려야 했던 시선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요제프 리와 도망쳐 진짜 가정을 꾸린다.

친구 민애방의 도움을 받아 한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화가의 꿈을 접고, 작가이자 후원자, 그리고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내는 존재가 되었다. 그녀는 세상의 폭력 앞에서는 단호했고, 약한 존재들 앞에서는 따뜻했다. 독립적인 존재로 당당히 섰던 만큼 자녀들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존중하고, 재혼한 남편 홍낙환의 딸인 홍경아도 편애하지 않고 품어준다. 그 덕에 자녀들과 손주들 모두 그녀를 사랑과 존경으로 기억한다.


“할머니는 강렬한 인물, 보편적이지 않은 인물이었다. 성격상 쉽게 분쟁에 휘말리는 편이었고, 그럼에도 자기 의견을 좀처럼 굽히지 않았으며, 대중의 가벼운 사랑과 소수의 집요한 미움을 동시에 받았다. 쉽사리 희미해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대에 따라 다른 평가를 받았는데 세상을 뜨고 십 년이 지나자 사람들이 어디선가 자꾸 조각 글과 영상들을 발견해냈다.” (16)


손녀 화수의 말처럼, 시선은 사후에도 계속해서 사람들의 삶 속에 살아 있었다. 그 영향력은 유산이라는 이름으로 계승되었다.



『시선으로부터,』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시작되지만, 그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하와이에서 기획한 시선의 10주기 제사는 단순한 추모 행사가 아니라, 그녀의 ‘정신’을 기리는 의식이었다. 시선의 제사상에 올릴 반짝이는 보물을 찾는 과정은 시선과 다시 만나는 시간이었고, 자신이 가진 문제, 상처, 고민에 직면하는 내면 여행이기도 했다. 큰딸 명혜는 하와이의 문화와 정신이 담긴 홀라 춤을 배워 시선에게 바쳤고, 명은은 아버지 요제프를 기억하며 화산섬을 트레킹 했다. 명준과 난정은 서로 다른 취향 속에서 조화를 이뤄가며, 광고 회사 운영에 지친 경아와 명혜 역시 시선과의 추억을 되새기며 회복의 시간을 가졌다.


시선의 손주들 역시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약한 몸과 건강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끝까지 파도타기를 해낸 우윤, 새와 생태를 사랑하는 해림, 친구 관계로 고민하는 규림, 무지개 사진을 찍으며 삶을 기록한 지수, 염산 테러 이후 세상과 단절된 화수까지. 이 인물들은 결핍을 지닌 존재들이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작가는 누구 하나 소외시키지 않고, 모두에게 고유한 서사를 부여하며 ‘다정한 시선’을 건넨다. 각자의 이야기와 시선의 옛 기록이 교차하는 구성은 매우 독특한데, 전체적으로 섬세하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331쪽)



심시선의 유산은 단지 재산이 아니라 ‘기억과 신념’이다. 그리고 그 정신은 자손들의 삶 속에 깊이 스며 있어서, 그들의 행동과 말, 선택에서 드러난다. 시선의 자녀들은 고고학자, 예술 복원가, 뮤직 디제이, 캐릭터 디자이너, 광고인, 비행기 조종사, 회사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기 역할을 다하며 서로를 존중한다.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야생에서라면 도태되었을’ 무른 존재들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 강한 것일지 모른다. 상처와 결핍을 안고 살아가면서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바로 우리 자신을 닮아 있다. 개성 넘치고 사랑스러운 가족을 보며, 문득 연대나 연결됨의 가치가 우리에게 얼마나 귀한지 생각하게 된다. 어렵고 혹독한 시대를 잘 살아내고 자신이 겪었던 일과 기억들, 상처를 글로 승화시킨 시선이 그랬듯이, 자신만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유산’이 아닐까.


단지 가족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제국주의의 잔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혐오와 불신, 기후 위기까지 보다 넓은 사회적 맥락을 함께 아우른다. 여성의 목소리를 중심에 두고, 모계의 유산으로 이어지는 연대와 사랑을 그린 문장들은 울림이 크다.


정세랑 작가는 역시 뛰어난 이야기꾼이다. 무겁고 아픈 이야기를 경쾌하고 섬세하게 풀어가는 솜씨가 탁월하다. 『시선으로부터,』는 시대를 앞서 산 한 여성의 생애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계승해야 하는지를 되묻고 있다. 심시선 여사가 남긴 스물여섯 권의 책을 읽어보고 싶다. 그 치열했던 시대를 견디며 써낸 삶의 기록들이 왠지 지금 우리에게도 길잡이가 되어줄 것 같기 때문이다.


내 아이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하길 바라는가?

나는 어떤 유산을 남길 것인가?


책의 울림이 메아리처럼 남아서 나와 우리 가족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각자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가고 기록하고 이어나가는 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과제이리라.



#정세랑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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